삶이 분노로 가득 찬 이들에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데이비드 O. 러셀, 2012)

by 가람
분노는 삶을 향한 강한 긍정


세상에는 상처받기 쉽게 태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무던하게 하루하루를 넘기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이고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들려 혼자 괴로워하다 무너지곤 합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혹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생각에 무력감에 휩싸이고 무력감은 곧장 분노로 표출되고는 하죠.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데이비드 O. 러셀, 2012) 속 두 주인공 ‘티파니’와 ‘팻’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사별 후 모든 직장 동료들과 잠자리를 갖고 해고된 티파니나 아내의 외도를 목격해 폭력을 휘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팻이나 그들이 느낄 분노와 상실감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남들은 그들을 미친년, 또라이라고 부를지 언정 저는 두 사람이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응원해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결핍을 숨기느라 분노를 표출하며 다니던 인간이었기에, 그리고 같은 상처를 가진 이를 만나면 저 역시 분명 이건 운명이라고 믿으며 마음을 열어 누군가의 한 줄기 빛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 사람의 편에 서서 걷고 싶습니다.


이미지 출처 :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하 동일)


티파니와 팻을 분노하게 만드는 트리거는 아주 사소합니다. 병원 대기실에 흘러나오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노래나 남들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는 두 사람의 가슴속 깊은 상처를 건드려 감정을 울컥 새어 나오게 하죠.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일 때문에 대단한 난리를 친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너무 커서 그럽니다. 지키고 싶은 건 너무 많고 행복해지고 싶고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아끼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내가 사랑하는 나와 내 주변이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해서 작은 트리거에도 감정이 요동치다 못해 터져 나오는 겁니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빛처럼 괴로운 일 뒤에는 행복이 찾아온다는 영어 속담.


이처럼 상처받은 이들의 사랑은 분노로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검게 변한 마음을 되돌리려면 대단한 솔루션이 필요할 것 같아 사람들은 쉽사리 손 내밀지 못하지만 동화 속에서 마녀의 저주를 푸는 열쇠가 키스인 것처럼 치유법은 아주 간단하답니다. 그들은 단지 또다시 상처받을 까 봐 두려워서 트리거들로부터 자신을 가두고 있을 뿐이지 본질은 사랑 가득한 이들이기 때문에 사과 한마디, 공감 한 번은 그늘진 그들의 마음을 풀기에 충분합니다. 식당에서 대판 싸우고 난 뒤에도 편을 들어주는 티파니의 모습에 감정을 진정시키고 마음의 문을 여는 팻처럼 말이죠.



또다시 상실감을 느낄까 봐 두려워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감정의 소강상태를 지나고 나면 또다시 사람을 찾아 헤맵니다. 연애든 우정이든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며 다시금 인류애를 느끼고 삶을 살아갈 이유를 만들죠. 영화에서는 치유의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춤을 활용합니다. 티파니는 팻을 대신해 편지를 전달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팻은 티파니를 위해 댄스 대회 파트너로 참가하게 되는데요, 연습실 앞에 가만히 앉아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빌려 감정에 솔직해지고 안 쓰는 근육을 움직이며 생각을 비우고 함께 무언가를 연구하고 만들어가며 두 사람은 시간과 믿음을 쌓아갑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댄스 대회 결과는 처참했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떻겠습니까. 그 어떤 팀도 티파니와 팻만큼 열정적으로 즐겁게 춤을 추진 않았을 겁니다. 고작 10점 만점에 5점만으로 행복하다니 저는 그걸로 만족하렵니다. 댄스 대회가 끝난 뒤 ‘Dear Tiffany’로 시작되는 팻의 진심 어린 고백에 분노가 사랑으로 바뀌는 마법보다 더 뿌듯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고슴도치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서로에게 세상을 살아갈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이 로맨틱 감동 스토리에 대회 결과니 뭐니 하는 지엽적인 것들은 무시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생각해봅시다. 내 삶이 지금 분노에 가득 찬 이유가 무엇인지. 혹 넘치는 나의 노력과 사랑이 무시당해서라면 다 내려놓지 말고 언젠가 찾아올 구름 속 한줄기 빛을 기다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면 주저 말고 손 내밀어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길 바랍니다.


내게는 온화한 봄이 있지, 후덥지근한 여름도 있고, 잘 익은 마음의 질감을 느끼는 나날들도, 심장의 둘레가 시린 그런 날들도, 좋아. 내 마음은 사계절을 가진 나라이구나,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곁에 서 있는 당신, 단신의 계절이 매섭다고 생각하며 외면하기보다는 지금 당신은 겨울을 지나가아 보네, 곧 꽃이 피려나 보네, 생각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우리이기 이전에> 안리타, 홀로씨의 테이블, 2019, 133pp.



2022년 5월 15일

긴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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