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
시골을 벗어나고자 했던 꿈을 포기하자, 시골농사는 비로소 그녀의 유일한 삶의 목적지가 되었고, 선택지가 없어지자 그녀의 삶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땅과 더불어 하루 해를 맞고 하루 해를 보내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친정아버지가 중학교 진학을 '강요'하지 않아 국민학교 이후로 더 이상 학교에 갈 일이 없어졌을 때부터, 땅은 그녀에게 놀이터였고 노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노동의 터였다.
'아이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어떻게든 언니가 봐줄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제 스스로 공부도 하고 삶도 만들어나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서 좀 더 많은 수확을 만들고 아이에게 부쳐주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세가지를 공식처럼 외우고 살았다.
"인숙이네, 방에 있는가?"
어느 여름날 초저녁, 아랫마을 사는 조실마을에서 시집 온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찾았다. 자라는 볏잎을 제대로 간수하느라 아침저녁으로 눈코 뜰새 없던 여름 한철이어서, 언니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작은 일이 아닌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실언니는 며칠 전 다녀온 고향 마을에서 보고 들을 것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어무니가 혼자 가게에 들러서 4홉들이 소주 두병 사가는 걸 내가 직접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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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는 더 굽어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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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이 직접 가게에 들렀는지... 묻다가 말었어. 며느리 자리가 시어머니가 술 많이 마시는 걸 좋아할리는 없는 게 당연하니까. 어무니가 아무리 좋아해도 잘 안 받아주고... 그랬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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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아줌마한테 들으니까, 어무니가 오래전부터 직접 가게에 들러 소주를 받아가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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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앞에 앉아서 한참 동안 내 손을 꼭 쥐다가 집으로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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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언니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하나하나 떼어내 던지듯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허리가 밑으로 90도보다 더 숙여진 늙은 노인네가 소주 두 병이 든 검은 봉지를 허리춤에 얹고, 지팡이에 기대어 간신히 발걸음을 떼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어머니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더 묻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사실은, 조실언니가 방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순간,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잊고 살았던 한 사람을 퍼뜩 떠올렸다. 자신이 두 번의 서울생활을 시도하고, 결국 실패해서 다시 시골생활을 시작하는 인생의 굴곡을 넘어가는 사이에 친정어머니는 그녀의 인식으로부터 방치되어 있었다.
친정엄마...
내 엄마...
조실집에 혼자 남은 엄마.
조실언니로부터 짧게 전해 들은 것으로 모든 상황은 더없이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부터 양오빠와 양오빠의 생부가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첫째와 둘째 언니가 쫓겨나듯 시집을 가던 날, 자신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 뒤꼍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친정엄마의 모습이 차례대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시집을 떠나오던 날, 그녀의 어머니는 다가올 구차한 삶의 형편을 예감했는지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줄줄이 딸만 셋을 낳은 죄이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면서 참고 참아왔던 설움이 막내딸까지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에 터져버린 것이다. 남은 자신이 서러웠고, 아무것도 쥐어주지 못한 채 다 내보낸 딸들에게 미안함이 복받쳐 올랐다.
조실언니가 돌아가고 나서 한참 동안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방안에 머물렀다. 별다른 표정 없이 허공을 응시한 채,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길산장에 심부름을 나왔다가 우연히 고향집에 들렀던 기억을 떠올렸다. 시댁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이어서 먼발치에서 살짝 본 엄마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 양오빠의 부인이 내뱉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남들 다 먹을 때 안 먹고 이렇게 늦게 드시면 두 번씩이나 밥상 차리고 치워야 돼요. 이 바쁠 때 손도 없어 바빠 죽겠는데, 꼭 이렇게 하셔야 돼요?'
.....
'아무리 술이 좋으셔도, 이렇게 바쁠 때는 좀 안 드셔도 되지 않아요?'
....
친정엄마가 뭐라 했는지, 아니면 밥상을 밀어 놨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양오빠 부인의 목소리만 이어졌다. 어떤 걸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터졌다.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존재가 된 것이거나..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해서 이제 익숙해졌거나, 더 먹는 상황이었는데도 군말을 하시기 싫었거나.. 어떤 사유이건 말씀이 없으셨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 밥상을 던져 버리고 한바탕 괴성을 지르면서 그녀의 어머니를 데리고 나와, 시댁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었다.
“이보세요. 어머니가 이도 성치 않으시고, 좀 늦게 자시는 건 당연한 것을 그리 매몰차게 노인네 밥상을 거둬들이나요? 엄마, 나하고 우리 시댁으로 가자"
그녀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듯이 집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마을을 벗어나 넓은 논이 펼쳐지는 어귀에 정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모녀는 한동안 그곳에 걸터앉았다. 엄마 손을 꼭 잡았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허접스러웠다. 몇 달새 손바닥마저 눈에 띄게 말라버린 듯했다.
"그래도, 시집간 지 일 년도 안되었는데 시댁에 가서 신세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니 처지가 어떻게 될 것이며, 나도 절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니들 키우고 정 붙이고 살아온 이 집에서 좀 더 견뎌보고, 정 안되면 그때 다시 보자."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 동네 언니들 어르신들한테 다 물어볼 거야. 그리고 나도 더 준비할 것이니까, 때 되면 굳이 여기서 붙어있지 않고 우리 시댁으로 가서 살아”
그녀는 눈으로 엄마의 대답을 확인하고서, 조실집 마당에 흩어져있는 밥상이며 그릇들을 치우고, 다시 엄마 곁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막차 시간에 맞춰 시댁으로 돌아왔다.
조실언니가 다녀간 다음 날, 그녀는 남편에게 통보하듯 어머니를 데리고 오겠노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나를 이 집에서 이 정도 일하는 사람으로 계속 쓸라면 엄마 문제는 같이 해결해줘야 한다는 통보였다. 그녀가 조실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신 채 마루에 걸터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제저녁 막내딸로부터 모시러 온다는 통보를 들었을 때 이번에는 어쩔 수 없구나 하면서 마음의 결심을 굳힌 터였다. 어머니 짐은 하얀 모시 저고리, 치마 두벌, 간단한 속곳과 내복 몇 벌이었다. 어쨌건 그 집은 어머니의 터였으므로,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고 나오기로 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도 불편하고 자신을 모시는 사람도 불편해하는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남편을 원망할 힘도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구차한 형편만 모면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체면 하나로 버텨온 삶인데,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는 삶이 된 것, 마음으로 도움받을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 것, 그 형편에 속한 자신을 타박하고 원망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가장 닮은 게 그녀였다.
시집와서 삼십 평생을 살아왔던 내 집의 대문을 넘어설 때, 어머니는 잠시 망설였다. 며느리는 대문 밖으로 따라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자식인지라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었을까? 대문 뒤에 주뼛이 숨어서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집안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시어머니와 막내 시누이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딸과 어머니는 천천히 마을길을 따라 문산 쪽으로 난 고갯길로 들어섰다. 마을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 말없이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했다. 친정어머니가 시집간 막내딸을 따라 집을 떠난다는 소문이 마을에 순식간에 조용히 퍼졌던 까닭이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보냈다. '조금만 지내다 돌아올 테니 잘들 지내시게.' 하는 마음만 전했다.
조실마을을 품에 안듯 서 있는 뒷산 고갯길을 다 오르자, 친정어머니는 잠시 쉬어가자 하시면서 뒤를 돌아 마을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시집와서 50평생을 살아온 집과 사는 동안은 하늘 같았으나 이제는 원망 덩어리로 남은 남편의 무덤이 가까이 눈에 들어왔고, 마을 앞에서부터 멀리 넓은 논과 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 김씨가 밭매러 가는가 보다’
김 씨는 젊은 시절 그녀의 집에서 머슴 노릇 하다가 남편 도움으로 땅을 모아 독립한 사람이다. 천성이 성실했고 남편을 따랐다.
‘응, 맞어 김 씨 아저씨네…. 인제 일어나서 걸어요. 여기로 다시 올 날이 있어. 아예 떠나는 게 아니니까, 너무 길게 아쉬워 마세요’. 그녀는 허리가 반쯤 구부러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 일어서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허리는 그새 더 구부러져 있었다.
두 모녀는 이 십리 길을 걸어서, 그녀의 친정에서 그녀의 시댁으로 건너왔다. 그 길은 익숙한 길이었으나 두 모녀가 이렇게 건너올 줄은 몰랐던 낯선 길이었다. 길지 않은 이 십리 길을 어머니는 몇 번을 쉬어가자고 하셨다. 힘이 들어서였을까? 서러워서였을까? 도착이 힘겨워서였을까?
그녀가 친정엄마를 시댁에 모신 것은 근방 면단위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아마 살아있는 사람들 기억이래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들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못되게 모셨길래 저러했을까가 첫 번째로 회자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시댁 부모와 친정엄마를 같이 살게 할까? 같이 살 수 있을까가 두 번째로 회자되었다. 세 번째로 이 모든 걸 감행한 그녀의 철없는 무모함과 강단이 대단하다고 회자되었다.
의아스러운 건 그녀의 시어머니였다. 남편을 여의고 며느리 눈치를 보기 시작한 걸까, 적적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동병상련이었을까... 시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하게 허리 굽은 노인네를 환영하는 투였다. 친정어머니가 머물던 시간 동안, 두 노인네는 같이 얘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일을 같이 하고, 주전부리를 같이 나눠먹고, 같이 웃기도 하고 하면서 그렇게 지내는 것이었다.
두 노인의 삶은 극과 극이었다. 시어머니는 술을 한잔도 못하는 반면 친정어머니는 아침을 제외한 끼니때마다 반주가 필요한 노인이었다. 시어머니는 평생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온 살이 뽀얀 특이한 시골 노인이었던 반면, 친정엄마는 아들 못 낳은 죄로 남편한테 버림받은 노인였다. 웃음이 많았던 노인과 울음이 많았던 노인네, 아이 같은 노인네와 웃철든 노인네였다. 아마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에게서 자기는 잘 모르는 거친 세파를 힘겹게 헤쳐온, 약간 거칠지만 언니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친정어머니는 1개월 정도 머물다 갈 예정이었으나 3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때가 그녀에겐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웠고 어떤 면에서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3개월이 지나자 친정어머니는 가볍게 짐을 꾸려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다. 미워도 자기 집이 있는 터였고, 여기서 더 있는 것은 죽어도 못할 노릇이었다. 친정집에서 상황이 달라진 것 없었기 때문에, 친정엄마는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첫째 언니네와 둘째 언니네를 포함하여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주로 막내딸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짧게 짧게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 집을 다녀오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양아들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날까지도 멀쩡하게 학교에 다녀왔던 양오빠는 갑자기 닥친 심장마비 증세에 어떻게 조치할 시간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소식을 접한 친정엄마는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탓했다. 가진 것을 양자로 들인 친척집에게 모두 빼앗기고도 아들을 낳지 못한 죄라 여기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그 죗값을 항상 체감하게 해 준 양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니... 그나마 세 명의 (양)손자를 남기고 떠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평생 자신과 딸들의 가슴에 못을 박더니 그 죗값을 치르고 떠났다고 좋아해야 할지, 그래도 자식인데 부모보다 먼저 떠난 것을 불효라고 탓해야 할지, 기껏 들인 양아들조차 짧게 운명을 마치게 된 것을 또 다른 자신의 기구한 운명 탓으로 돌려야 할지.. 친정엄마는 이 모든 것을 끌어 앉은 채 더 이상 양아들이 없는 조실집으로 향하였다.
풍습대로 장례식은 집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돌아가신 분은 골방 깊숙이 안치되었고, 안방과 건넌방이 제사와 인사를 올리는 방으로 꾸며졌다. 앞마당과 바깥마당에 커다란 임시 천막과 포장이 쳐져서 손님들에게 식사와 술을 대접하는 장소로 꾸며졌다. 장례기간 내내 조실마을의 거의 모든 아낙네가 참여하여 음식을 만들어 내고 주방을 정리하였고, 거의 모든 남정네들이 참여하여 임시 천막을 설치하고 마지막 묻힐 묘와 묘까지 다다르는 길을 말끔하게 정리하였다. 사흘 밤과 낮으로 마을 사람과 문상객들이 어우러져 조실마을 전체가 시끌시끌하였다.
그녀는 장례식 내내 머물면서 오빠를 잃은 상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가능한 한 많은 손님을 직접 맞아 감사인사로 답례를 했고, 필요한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특히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실신하듯 충격을 받은 언니에게 진심을 다해 위로했고, 최대한 쉴 수 있도록 배려를 다했다. 예를 올리는 손님이 뜸할 때는 어김없이 밖으로 나와 상과 상에 모여있는 조문객들에게 최대한 고마움의 인사를 올렸다. 그녀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보며 놀라워했다.
장례 마지막 날 밤,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에 그녀는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집안과 밖을 거닐었다. 비로소 내 집에 다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느낌. 강제로 빼앗아 갔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더 이상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양오빠의 죽음은 여러 가지를 일거에 상기시켰다.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왜 그토록 모질게들 살아왔던가? 한마디라도 따듯하게 나누며 살지 못했던가? 떠나는 사람에게 속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양오빠는 이 모든 상식적인 생각과 관계를 막아섰던 일종의 벽과 같은 존재였다. 여느 시골집 출신과 달리 공직에서 출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고 그만큼 자존심과 이기심이 대단했다. 그를 제외한 사람들이 그 사람 앞에서는 일단 주눅이 들어버려 제대로 할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녀와 엄마와 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높았던 벽이 한순간에 사라진 지금, 자신이 커왔던 이 집은 항상 여기에 있었고, 잠시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 안온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공기를 했던 앞마당 부엌 앞, 고무줄을 메어놓았던 곳, 강아지가 살던 토방 끝, 영철 아저씨를 숨겨주었던 부엌 안쪽 광, 어머니가 각종 장을 담가 보관해두었던 뒷켵 장독대.. 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걷는 발걸음 걸음마다 그 위치에 얽힌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집은 그녀와 어머니와 언니들의 집임이 명백했다. 이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집의 모든 구석을 다 돌아보고 나서, 그녀는 언니로부터 못을 박듯 다짐을 받았다. '지난 일은 다 잊자, 이제부터라도 서로 의를 상하지 말고, 어머니 남은 인생만큼은 편하게 지내도록 도와드리자, 더 이상 원망도 미움도 없다, 그러니 어머니가 자신의 처소에서 편하게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실 수 있게만 해드리자. 언니도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하니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좋지 않겠나?' 그녀는 양언니에게 필요한 말을 꼭꼭 집어 전달했고, 양언니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같이 꼭 쥐었다.
밥 세끼 정성스럽게 들일 것
좋아하는 소주는 우리가 사놓을 테니 끊기지 말고 올릴 것
방은 항상 따시게 유지하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깨끗이 청소할 것
방에 별도 TV 놔드릴 테니 유지할 것
이제 당신도 서방이 없으니, 더 노인네에게 잘못하면 그대로 돌아올 것이고 어떻게든 당신한테 문제가 될 터이니 잘 깨닫고 얼마 안 남은 노인 공경할 것
친정엄마는 그렇게 90까지 사시고 명을 다하셨다. 돌아가시는 전날까지 그녀는 하루에 꼬박꼬박 사 홉들이 소주를 비우셨고, 독한 곰방대 담배를 피우신 채였다.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노인은 외손주를 찾았으나, 외손주를 만나보지 못한 채 길었던 삶을 다하셨다. 외손주는 서울의 대학에서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친 후였을까? 일말의 후회나 원망도 남지 않은 채 그녀의 마음은 홀가분했다. 90 평생을 큰 병치레 없이 사셨으니 다행이다. 아들 못 낳은 죄로 이렇게 버틴 삶을 이 정도로 끝마치니 본인도 원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날 행복한 기억은 있었지 않은가?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버지 곁에 묻히고, 봉분 작업이 마무리되는 걸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다시 들녘으로 나갔다. 그 어느 누구 하고도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90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간 엄마, 그렇게 살도록 만들고 보낸 사람들, 분노, 슬픔, 가여움이 그녀의 가슴속에 단단히 갇혔고, 가슴은 단단해졌다.
하루라도 논의 잡초를 뽑지 않으면 안 되는 더운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