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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Sep 11. 2021

인생의 후반 3

아이의 성장과 독립

서울 언니 집에 남겨 놓고 온 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녀의 나이 50 무렵이었다. 아이는 친척집에서 눈치 보는 생활을 하면서도 별 탈없이 자라 주었다.(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천성이 순한 아이였던 데다가 큰 언니의 살뜰한 보살핌이 큰 역할을 하였다. 자신이 어떤 사유로 이모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아이에게, 학업에 충실하면서 그 시절을 보내는 것 외에 별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대학교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창창한(?) 앞날이 어느 정도 보장되던 시절. 그녀의 시골 탈출기는 아이를 통해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 결착지는 아이가 (그녀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아이 곁을 빠르게 지나가 아이가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아이를 타지에 홀로 남겨두었다는 죄책감으로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입학식 날, 아이가 별 감흥 없이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인생의 한 단락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날 그녀 인생의 9할 이상을 차지하던 목표가 어설프게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3월 초, 녹지 않은 겨울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던 대운동장으로 매서운 겨울바람 불었고, 한 웅큼의 봄날 햇빛이 간혹 따사롭게 느껴지던 날, 그녀의 삶의 한 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으나 재수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녀의 큰언니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시한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이모네 식구들 사이에서는 아주 강력한 믿음으로)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까지였다. 아이는 똑똑했기 때문에 절대 재수같은 것은 안 할 것이다라는 것은 모두의 믿음이자 각오이자 바람이었다. 아이 스스로도 재수를 하겠다는 용기가 나질 않았다. 완강했던 그녀도 결국 재수를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큰언니와 아이, 그녀의 전부일 수 있는 두 존재가 거의 일치된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진행할 수 없다...우리 둘다 너무 지쳤다.'


결과적으로 그때 더 강력하게 '재수를 해야 함'을 주장하여 관철하지 못한 것을, 그녀는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기대한 대로 해주지 못한 아들을 원망하였고, 1년만 더 참아주지 못한 큰언니가 야속했고,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큰언니와 아들에 대한 원망은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스스로 지원해주지 못한 부족함을 탓하는 마음이 그녀의 가슴속에 쌓였고,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마음과 몸을 약하게 만들었다.


시골에서 논농사를 지어 사립대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은 녹녹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와 그의 남편에게 적지 않은 부채가 쌓여있던 상태였다. 지난날 과수원을 조성할 때 대부분 비용이 농협에서 대출받은 것이었는데, 두 해만에 고스란히 망가지면서 모든 건 빚으로 남았다. 부부는 한해 한해 힘겹게 이 빚을 갚아나가면서, 서울에 있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농협과 거래가 많았고, 크게 신용 잃을 일은 하지 않았던지, 이자가 높지 않았고, 필요할 때 추가 대출도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대출받아 등록금을  보내주고, 가을걷이 때 상환하는 방식이 이어졌다. 부부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나 대출금은 마치 그들의 등 뒤에 달라붙은 어떤 숙명처럼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아이는 얼마 안 되는 짐을 꾸려 5년간 신세를 진 이모집을 떠났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은 모두 남겨둔 채, 간단한 옷가지와 (이모가 챙겨준) 이불 한 세트가 이삿짐의 전부였다. 대학교 입학 후에 갖춰진 물건들 - 예를 들면 책, 책상, 탁상시계, 탁상전등 같은 것들..- 은, 구해놓은 하숙집 모퉁이에 차곡히 쌓아두었다. 자라서 자기 공간이 필요할 때 기존의 비좁은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했지만, 아이에겐 이미 그렇게 하기로 약속된 것을 실행하는 측면이 더 강했다. 


"뭘 하더라도 밥 세끼는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이미 아들 둘을 대학교에 보낸 경험이 있는 이모는 아이에게 이 당부를 반복해서 전달했다. 대학생이라고 해봐야 아직 철없는 아이들이고 게다가 남자애들끼리 사는 모습이란 뻔하게 예상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집에 와서 자고 가거라"

나머지 날들을 조금 부실하게 살아도 한 달에 한번 왔다가는 날 충분히 먹여서 보내면 젊은 나이이니 그래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네, 그동안 저 때문에 이모가 고생 많으셨습니다. 건강하세요"

마지막 집을 떠나는 순간, 아이는 이모에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힘겹게 자신을 건사해 준 시간의 길이만큼 길고도 강력한 미안함이 한순간에 닥쳐버린 느낌이었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어떤 감정상태에서 드디어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가 한다고 하긴 했는데,..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 그게 당연한 것이지. 그동안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도 잘 참아줘서 고맙다. 이제는 조금 자유롭게 살아도 된단다."


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모와 아이는 둘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길지않게 나누었다. 아이가 돌아서서 걸어가는 모습을 이모는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가 친구들과 같이 안암동 근처에서 자취할 집을 구하고 언니 집을 떠난다고 할 때, 그녀는 이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올라와서 집을 봐주고 이삿짐을 옮기고 마무리 정리를 해주고 싶었으나, 그리 하지 못하였다. 시골일이 너무 바쁜 탓도 있었으나, 아이가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5월 그 바쁜 시절을 골라 이사를 결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아이는 학교 근처에서 대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기간을 거쳐 대략 성인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아이들 소꿉놀이 같은 생활방식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육개월 정도 단위로 친구들과 자취하는 방식, 전문적으로 하숙을 하는 집에 들어가 생활하는 방식, 다시 자취하는 방식으로 바꾸며 생활했다. (고시공부까지는 아니어도) 졸업 후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 정의해놓고, 대학교 삶의 최소한의 비중을 그 목표를 위해 선뜻 투자했던, 철들었던, 많은, 일반적인 학생들과 달리, 아이는 구체적인 직업적 목표를 갖/지/ 않/은/ 채,  하루하루 단기적으로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가장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세상을 읽어내는 스킬을 알려주는 책들과 무조건적 사회 비판적 조류 혹은 트렌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삶을 구성하는 하루하루를, 겹/치/지/않/는 이벤트와 익사이팅한 어떤 것으로 채우는 것이 일종의 목표가 된 삶이었다. 그런 날들을 탐닉했던 대부분의 부류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 먹고 잘 자는 것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두지 않은 삶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게으른 삶이었고, 형편없는 삶이었다. 


그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그게 어떠한 삶이었는지 쉽게 이해하는 듯했다. 놀고먹는 대학생, 전공 공부에 과히 매달리지 않아도 훗날 취직 걱정은 하지 않는 팔자 좋은 학생, 학교 간판을 은근슬쩍 들먹이면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분위기를 즐기는 속류들, 그 전날 누가 더 많이 마시고 많이 방탕했는지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것이 일상이 된 그들... 사람들은 대략 이렇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 아이의 삶은 그러한 속성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질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아이가 실제 속한 그 '그룹'의 삶을 충실히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 이 아이들은 뭐가 저렇게 심각한가?'라는 의문을 먼저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 뒤로 '와? 정말 많이 마시고 취하였구나.. 어떻게 매일같이 저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뭐, 문학적으로, 사상적으로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구나. 그럭저럭 평범한 녀석들 아닌가?' 하며 위로를 건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세계를 제대로 인지해보려는 노력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이렇게 충실하고 심각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건, 총체적인 의미에서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것 아닌가?'라며 일종의 격려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속한 그룹이, ‘일반’ 학생들과 비교하여 명확히 달랐던 점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토론과 세미나로 보냈다는 점이고, 이를 더욱 특징적이게 한 것은 그들의 '자발성'이었다. 모든 토론과 세미나는 술과 노래와 또 다른 이야기가 점철된 형태로 새벽까지 이어졌다. 순수하게 고양된 자발성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진행되는 긴 여정에서 아이들이 지치지 않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아이는 이 행위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내면에 존재해왔던 '한 단계 높은 형태의 자유의지'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세미나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이 '순수하게 고양된 자발성'을 확보했다면, 세미나의 효과 혹은 그 결과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유능한 발제자와 진행자가 있어서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진행(상반된,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합리적인 주장이 두 개 이상 제안되도록 하고, 그 둘(혹은 둘 이상)이 서로 평등하게 부딪히고 섞일 수 있도록 하는 과정과 그 결과로 어떤 합리적인 결론에 ‘다 같이’ 다다르도록 하는 '이른바' 민주적 과정 일체)이 가능하다면, 한 꼭지의 토론 혹은 세미나가 참여하는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결론이 미치는 영향력, 한 꼭지를 통해 개인의 인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영향력)은 너무나 상당해서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미래의 방향을 바꿔놓을 정도였다. 


이 과정은 처음 몇 번의 과정이 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울 뿐, (지속할 수만 있다면) 이후에는 점점 탄력이 붙고, 속도가 나는 특징이 있다.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 혹은 material 들을 읽어내는 속도가 빨라지고, 토론에서 예상되는 접점과 논쟁거리가 보다 쉽게 capture 되고, 자신의 논거와 주장을 쉽고 빠르게 정리할 수 있게 된다. 1, 2학년 때는 주로 일 참여자로 활동하다가 2학년 중간즘에서는 신입생 1학년의 세미나를 리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도 중요한 진화의 일부분이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진행되어야 할 세미나의 내용을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이해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에 더하여 의견을 말하고 논쟁하는 것이 미숙한 참여자들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때로는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외연 화해 주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는데, 이과정을 1~2년 정도 거치고 나면, 그야말로 ‘상당한 수준’에 (사고하는 방식, 논거를 캡처하는 실력, 논쟁에 대한 방식, 이 모든 것을 상대방이 알아듣는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 이르게 된다.' 


그렇게 아이의 독특한 대학생활이 이어졌고, 비로소 그녀와 아이는 현상적으로는 '아주 다른' 두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갈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호 ‘객관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 혹은 최소한 생활비를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자기자 자식이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렵지만 그녀와 남편은 최선을 다해 다른 학생에 비해 부족함 없이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보다 자식에 대한 책임의 크기를 작게 설정하는 남편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생활비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내가 보내주는 돈이 부족한가?’였다. 아이는 '그렇지 않다, 이제 자신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리하겠다'는 알듯 말듯한 대답을 내놓았다.  


두 번째로 그녀가 느낀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품속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자리 잡는 상실감도 일부 있었으나,  주요하게는 아이가 바른 길, 즉 (그녀가 생각하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는 길에서 더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더 컸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전공이나 영어공부와 같은 것을 더 했으면 하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상실감이 되었건 실망감이 되었건,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녀는 정의하지 못한 채, 이 모든 감정을 ‘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무슨 재주로 지가 돈을 번다고..’하는 원망으로 풀어냈다.


이후로,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활비를 벌었고, 그녀는 아이에게 전달하는 생활비의 액수를 줄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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