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함께
그녀의 젊은 시간은 모두 지나가 버렸다. 아버지가 남긴, 몸을 꿰뚫는 것만 같던 아픔을 넘어서기 위해, 들과 산과 도시에서 발버둥 쳤지만 결국 아이만 도시에 남겨 놓은 채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출발한 직행버스가 마지막 목적지인 홍산 시내로 들어설 때, 어스름한 어둠 사이로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슬레이트 건물들, 봇짐을 이고 지나가는 아낙들, 중절모를 쓰고 구부정하게 걷는 남정네들, 읍내로 가는 도로 반대쪽으로 열린 넓은 홍산 들녁... 마치 어제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는 느낌처럼 그것들은 너무나 익숙하여 흡사 그녀에게 잘 돌아왔다고 말을 거는 듯하였다.
'그래, 이곳은 적어도 사람을 속이거나 배신하지는 않으니까..' 버스에서 내려 홍산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오히려 그녀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시골마을로 가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소고기 두 근과 말린 홍어, 시장통 입구에서 좌판을 벌인 아낙네들로부터 갖은 나물과 채소 등을 충분히 구매해서 시장 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웠다. 흡사 잠시 장 보러 나왔다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 시골마을 앞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탔을 때, 저녁은 제법 깊어서 버스는 그녀 혼자만을 실은 채 어둠이 깊게 내린 신작로를 덜컹 거리며 내달렸다. 시골마을 앞 정류소에서 시댁까지 사람들이 잘 닿지 않는 산길을 따라 시댁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새벽 5시, 그녀의 몸은 제가 할 일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은 모두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을 누군가 미리 알고 준비한 것처럼. 평상복은 몇 년이라도 주인을 기다릴 수 있다는 듯 벽에 걸린 옷걸이에 꿈쩍도 없이 걸려 있었다. 사랑방 문이 닿아있는 마루 밑 끝자락에 놓인 일터용 신발 위에 약간의 먼지와 거미줄이 덮인 것은 툭툭 털면 그만이었다. 살짝 들어 올려야 부드럽게 열리는 부엌문도 그대로였고, 강녕에서는 늘 그렇듯 작은 쥐 소리와 고양이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이제 이곳을 떠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무겁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늘 그렇듯 5시 30분 정도 일어나 새벽어둠 속으로 대문을 열어 젖히고 들로 나섰다. 부엌에서 오랜만에 새벽부터 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여기를 벗어나 좀 더 잘 살아보려고, 후손들을 조금은 더 나은 곳에서 키워보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고 돌아온 당신의 자식들에게 좀 짠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지난밤 며느리가 죄인처럼 조용히 걸어 들어왔을 때, 한 두 마디 지청구를 하려던 시어머니를 말리고, 제 방에 들어가 쉴 수 있게 무언으로 지원을 했다. 농사꾼이 땅을 벗어나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시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와 그 시간에 밥을 짓고 앉아있는 며느리를 뭐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와 시부모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서먹함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받아준 시부모에게,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눈에 띄게 친절하거나 자상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제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분들이었다. 어쩌면 실패를 하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음이 무의식 중에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해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남겨진 유일한 길은, 더 많이 노동할 수 있어서, 실패한 지난 몇 년을 최대한 빨리 회복하는 것, 그래서 큰 언니 집에 남기고 온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눈치 보고 지낼 수 있도록 최대한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 밖에 없었다. 큰 언니는 성심을 다해서 아이를 돌봐 줄 것임은 의심할 바 없었으나,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매달 소정의 생활비를 부쳐주고, 아이 스스로 잘 먹고 잘 생활하고 잘 견디길 바라는 것 밖에.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고, 한 틈도 제 몸을 쉬지 않았다. 그 어떤 노동도 그녀의 우울함, 공백을 메우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서울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감지되는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일 년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시골에서 반은 서울에서 사는, 세상 누구도 해보지 않는, 생활을 반복하게 된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보내버린 지난날들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귀결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자비나 고려 없이 세월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일종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의 사람처럼 감동도, 위로도, 실망도, 아픔도 없이 주어진 노동으로 닥치는 시간을 철저히 메워갔다.
남편에게 주어진 8마지기 논을 가게 구할 용도로 이미 팔아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이 짓는 모든 논은 일종의 소작논이었다. 8마지기를 넘겨받은 당숙에게 신신당부하여 소작으로나마 그 땅에 농사를 짓을 수 있게 되었다. 그 8마지기는 구시마을 앞에 일정한 넓이로 가지런하고 층층이 놓여 있어서 농사짓기에 편하고 특히 맨 윗 논과 중간 논에 둠벙이 자리하고 있어서 가뭄에도 끄덕 없이 벼가 자랄 수 있는 논들이었다. 시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논을 분배할 때 조금이나마 큰아들을 배려한 결과였다. 그들이 시골에 내려왔을 때 둘째와 셋째가 막 논을 팔아 넘길려던 차여서, 그것까지 그녀와 남편이 받기로 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옆동네 이씨 아저씨로부터 6마지기를 추가하였다. 그 결과 형제들에게 넘겨받은 16마지기에, 추가로 5마지기를 더하여 30마지기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 마지기 수로는 작지 않으나 전부 소작이었다. 두 사람이 30마지기를 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5마지기 넓이의 밭농사와, 뒷산에 심어진 밤나무까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감당해야 할 노동의 크기는 이미 일반 사람들의 것을 넘어섰다.
봄부터 논농사가 끝나는 가을까지, 그에 더해 마지막 한 톨까지 밤송이를 살펴야 하는 늦가을까지, 그녀는 단 하루도 쉼 없이 논과 밭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농사일 중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기간은 가을날 추수할 때였다. 들판의 모든 벼를 오로지 손과 팔뚝과 낫으로 베어나가고, 들판에 널려진 볏단을 지게로 바깥마당까지 날라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한낮의 추수 노동에 집중하였고 다른 잡일은 잠시 멈추는 기간이었다. 그들이 하루 고된 일과를 끝내고 힘겹게 집으로 향할 때 그녀는 뒷산 밤나무밭으로 향했고, 어둑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어 올린 밤 푸데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밤을 주울 때는 허리를 펴는 일이 없었다. 손으로 온 산을 훑는 방식으로 흩어진 밤을 주어 올렸다. 땅에 떨어져 있는 따가운 밤송이가 그녀의 거친 손바닥은 뚫어내지 못했다. 남편은 자신이 밤나무를 심어놓았지만, 밤나무가 그리 큰 수익이 안된다는 걸 알고(남편이 밤나무를 심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밤나무를 심기 시작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 값은 거둬들이는 노동의 값을 제외하면 거의 값어치가 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일주일을 주어 올린 밤 두 포대를 농협에 내다 팔면 3만 원 정도 수입이 들어왔다. 그렇게라도 주어서 내다 팔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떤 것이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작지만 결과가 나온다면 그녀는 마다하지 않았다. 바슴이 끝나면 바로바로 품앗이를 다녔다. 집안 농사를 위한 품앗이는 모두 끝냈으므로, 추가된 품앗이는 오롯이 하루 품삯으로 남는 품앗이 아닌 품앗이였다. 사람들은 저러다가 몸이 먼저 망가질 것라며 혀를 끌끌 찼다.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줄일 수 있는 건 그녀를 위한 시간들을 줄이고 자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가끔 나가던 교회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아이를 위해 나가거나, 그래도 바람 쐴 겸 나가보던 장터로 일절 나가지 않았다. 필요한 건 남편이 알아서 사 오도록 했다. 심지어 밥 먹는 시간도 줄이고 싶었다.
언젠가 아이는 그녀가 물김치에 밥을 말아먹는 모습을 보았다. 식구들 식사가 다 끝나고, 물린 상들이 부엌 바닥에 놓여있었다. 아이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부엌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물린 상 주변에 앉아 밥밥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왜 물김치에 밥을 말아먹어?
이게 제일 빨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네..(그녀는 진심으로 홀가분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그녀가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밥을 들이마신다고 느꼈다. 흡사 전쟁터에서 기필코 살아남겠다고 다짐한 전사의 모습과 흡사했다.
벼농사가 정리되고 밤 줍기가 끝나고, 더 이상 품팔이할 게 없이 가을 농사일이 정리되면, 그녀는 이내 콩이건 채소 건 무엇이 되었건 언니네와 고모네에 줄 수 있는 것을 바리바리 쌓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서울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는 날은 이모집에서 들렀다. 언니는 점점 악착같아지는 동생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은 고모집에 들러 가을걷이한 것을 떼밀다시피 남겨두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그녀가 원하는 건 수당이 좋은 직업이 아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식당일이건 가정부 일이건 어떤 것이건 바로 손에 잡혔다. 그리고는 겨울 내내 악착같이 한 푼이라도 더 손에 쥐려고 바둥거렸다.
그녀의 이런 생활은 아이가 고3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에게 우울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끔 일이 없는 순간에 멍하니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평생 그런 일은 없었다. 자신의 그런 새로운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녀는 경악했다. 그 모습을 털어내기 위해 그녀는 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육체가 노동으로 시달릴 때 정신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으나, 길지 않은 잠자리에 들 때 아이들은 그녀의 가슴 안에서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우울증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녀 스스로 털어내려고 털어내려고 온갖 일을 다하는 동안, 천천히 숙명처럼 그녀의 대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아이들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 아이들 걱정하는 마음이 합쳐진 지긋지긋한 현실을 그녀는 하루 18시간 이상 계속되는 가혹한 노동으로 눌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