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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Oct 05. 2021

소년. 그녀를 보는 또 다른 창 5

소년의 이모

소년의 부모가 가진 모든 것을 들여 시작한 선술집은 불과 1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보증금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가겟세 지불이 어려운 상황이 되자, 부부는 가게문을 닫았다. 시골을 떠나 살아보겠다는 젊은 부부의 의지도 함께 닫혔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골로 돌아가 땅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것. 소년은 엄마아빠가 가게문을 닫고, 남은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엄마아빠는 소년에게 '너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무슨 말이었을까? 부모님이 '우리는 시골로 돌아가야 한다, 너는 여기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면 된다'라고 했을 때, 어렴풋이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것은 이별을 의미했다. 자신은 이모집에 보내질 것이고, 남은 학생 시절을 이모네 집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큰 이모집에 얹혀살면서 근방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요? 저도 시골에 가면 안 되나요? '라는 의문은 입안에서 잠겼다. 부모님의 결정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소년은 이미 서울의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있어서, 여기서 다시 시골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이모네 집은 그동안 거의 매주 한 번은 들러서 밥도 먹고 형들과 놀던 곳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인 거부감도 크지 않았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따로 살면서 방문하는 것과 같이 산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른 것이라는 것을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모부는 소년의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화양면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이모와 결혼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모부는 정식으로 교사가 된 케이스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늘어나는 아이들과 학교 숫자를 충원되는 교사의 숫자가 따라가질 못하였기 때문에, 대도시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마치고 간단히 교사 이수교육을 받으면 임시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승진상 불이익은 있었지만, 한번 임시교사로 일하기 시작하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큰 문제없이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모부가 교사로서 부족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교감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평교사로 정년 퇴임한 사유였다. 어느 날인가 이모는 소년에게 담담히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소년이 딱히 그것과 관련된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모가 그 말을 '하는 것'이 필요했던 순간에, 소년이 이모 곁에 있었을 뿐이다. 이모부가 연령상 학생주임으로 승진할 수 있는 마지막 해, 승진 발표를 바로 앞둔 날이었던 듯하다. 혹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거나.


이모네는 소년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해에, 전/격/적으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기억해보자면, 소년의 부모들도 피해를 봤던 달러계 파산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피해를 받은 지인과 친척이 서천 바닥에 즐비해서 편히 고개를 들고 다니기 힘들었고, 명색이 학교 선생님이 달러계에 크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체면이 크게 상한 상태였다. 슬하에 4녀 2남으로 큰 가족이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아이들을 어디서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계가 망가지고 고향에서 삶이 크게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순간 도회지로 이동을 결심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로 이동을 신청했으나 가까스로 안양의 조그만 국민학교로 전출을 허락받았다. 이모부는 과천에 아파트를 장만할 때까지 방배동에서 안양으로 출퇴근하였다.


(현재) 이수역에서 내방역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길 좌우로 비슷한 형태의 2층 양옥집이 빼곡했는데, 아직 아파트가 많지 않았던 시절, 방배동의 단독 2층 집 건물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상징적인 모습과도 같았다. 이모네 집은 언덕길 우측으로 한참을 올라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1층은 집주인이 살고 2층은 이모네가 전세로 살았다. 방 세 칸으로 작은 집은 아니었으나, 같이 살아야 할 식구가 워낙 많았다. 작은 방은 이모와 이모부가, 안방은 그때까지 정정하게 살아계신 이모의 시어머니와 두 이종 사촌 누이들, 중간방은 소년과 이종사촌 형 두 명이 나눠 썼다. 이모는 국민학교 교사가 가져다주는 월급으로 거의 완벽하리만치 주모 있게 가계를 꾸려나갔다.


이모네 집의 모든 식구들은 소년에게 기본적으로 친절하였다. 소년이 어떤 사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조금씩 참아내고 있었다. 참고 침묵하고 견뎌내는 과정은 대체로 잘 진행되었지만, 가끔 침묵이 깨지는 결절의 순간들이 어쩔 수 없이 그들 사이에 찾아오기도 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주관이 명확했고 솔직했던 (여자 형제 중 막내) 이종사촌 누이는 소년이 이모네 집으로 들어오는 날 전후로 일본 여행 중이어서 소년이 식구가 된 과정을 알지 못하였고, 의사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와 쉬고 있던 평일 한낮에 소년이 가방을 멘 채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반갑게 소년을 맞아주었다. 아!.. 소년의 학교가 가까웠기 때문에 잠시 인사차 혹은 심부름차 들렀을 것으로 이해했다.


'인철이 왔구나. 오랜만이네. 어서 와. 평일에 어쩐 일?' 그때까지 사촌누이는 평소처럼 친절하고 활달하게 소년을 맞아 주었다.

'아, 네. 누나. 안녕하세요...' 이모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사촌누이는 미리 알았어야 할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소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자기 입으로 '저, 이제 여기서 살아요'라는 말을 왠지 할 수가 없었다. 여름날이었을까? 소년의 마음속에서인가 아니면 이모네 집 거실 밖 베란다에선가 엄청난 크기의 매미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아무 말 없이 거실에 서 있는 동안 사촌누이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소년 앞에 디밀었다.

'인철이 오늘 이상하다. 덥지? 이모 심부름 왔구나. 이거 먹으면서 편히 쉬어. 큰 이모는 잠깐 장에 가셨어.' 그러고 나서 사촌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 TV를 보기 시작했다. 사촌누이는 습관적으로 AFKN을 시청하였는데, 그날도 TV에선 소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형들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밖으로 나와 사당동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이모네 집 옆 비탈진 골목을 빠르게 벗어나 왕복 2차선 찻길이 나타나자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지금이 엄마 손을 잡고 이모네 집에 놀러 왔다가 사당동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소년의 마음속에 들어찼다. 걷고 걸어 사당동 골목에 다가가도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빨리 걸을 이유가 없었다. 길바닥 위의 둥근돌을 툭툭 차면서 혼자 걸어야 할 이유가 늘었다. 삼호아파트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걸었었다. 그때는 엄마와 방이 그곳에 있었다.


사당동 시장통 골목이 끝나는 곳에 간이식으로 지어진 승일이네 집. 어느새인가 소년은 그곳에 닿아 있었다. 승일이와 아이들은 골목에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각각 다른 중학교로 흩어졌고, 학교에 따라 방과 후 시간이 조금씩 달라졌다. 무엇보다 중학생이 된 소년들은 더 이상 검은흙바닥, 좁은 골목길에서 모이지 않았다. 소년은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승일이네 집 앞 좁을 길을 지나 큰길로 올라서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혹시나 승일이 엄마가 소년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해드릴 대답이 궁했다. '그냥 옛날에 애들하고 놀던 골목길이 그리웠어요'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큰길로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 끝에 잠시 앉아 있었다. 손목으로 코끝을 문질러 봤지만 다행히도 검은 먼지는 묻어 있지 않았다.


소년은 늦지 않게 이모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먼 길로 이모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관악산 너머로 넘어가고 좀 지난, 어둠이 내려있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누르자, 이모와 사촌누이가 달려 나왔다.


부엌에는 소년에게 먹일 밥상이 따로 차려져 있었다.


'야, 그런 거면 네가 얘기를 했어야지. 왜 그래. 똑똑한 줄 알았더니.. 바보네. 지인철.' 사촌누이는 이모한테 충분히 혼난 듯, 상황을 헤아리고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크게 밥을 떠 입에 넣으며,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어딜 다니다가 이제 온 거야. 이모가 걱정이 많았잖아' 소년을 잘 아는 이모는 정작 걱정이 크지 않았을 것이나, 사촌누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고 이 골목 저 골목 찾아 나선 것 같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이랑 놀기로 해서, 학교에 있었어요' 소년은 차마 엄마랑 살았던 사당동 골목에 다녀왔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이모는 소년이 밥을 먹고 간단히 씻고 형들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소년은 평소처럼 학교 숙제를 마치고 사촌 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고2였던 형은 밤 12시가 넘도록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형의 등 너머로 탁자용 형광등이 빛나고 있었다. 그날 벽으로 돌아누어 잠이 드는 동안, 소년은 어깨 움직임 없이,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누구한테 혼난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당한 것도 아닌데, 일정량의 슬픔이 가까스로 한계를 넘어 흐르듯 아주 적은 양의 눈물이 긴 시간 동안 흘러내려 코 옆으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년은 혹시 들척이면 형이 눈치를 챌까 봐 흐르는 것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막내 사촌누이는 기본적으로 친절하였지만, 동시에 막내딸다운 솔직함은 잃지 않아, 왜 이 좁은 집에 소년마저 같이 살아야 하는지를 매 순간 이모와 소년에게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이모는 소년이 있을 때는 눈으로 다그쳤고, 소년이 없을 때는 엄한 말로 다스렸다. 그럼에도 사촌누이는 여유롭지 않은 자기 가족의 공간이 이해 안 되는 동거로 침해받는 것을 이해하고 수긍하기 쉽지 않았다. 사촌누이가 마침내 이 좁은 집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동거/독립하기로 한 날, 소년은 반은 기뻤고 절반은 미안했다. 누이는 이태원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인과 결혼하여 지금은 교토에 살고 있다.




이모에게 소년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버거운 부담이었으나, 소년을 맡아달라는 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소년이 어떤 의미인지를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모소년영특한 발언에  번을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절할  없었던 사유는, 동생에게 달러계를 소개하고 참여를 권유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러계를 말아먹은 것이 남편의 동생이었다. 이모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평생을 다해도 갚기 어려운 책임감과 미안함으로 남았다.  


이모네가 서울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지금 사당역 근처 반지하 방 두 칸 전세였다. 이모네 식구들끼리는 좁은 거실까지 포함하여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었으나 소년이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모는 이모부를 설득하여 조금 남은 현금과 교사직을 건 은행 대출을 추가해서 방배동 방 세 칸짜리 2층 집으로 전세를 옮기게 된다. 그렇기 하기 위해 1년이 흘렀고 소년이 중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이모네 집은 이사를 했고 소년도 새롭고 깨끗한 집에서 등교를 시작했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이모집에서 마치게 되고,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교 근처 하숙집으로 나갔다.


소년은 대학생활 이후 이모 외에는 이모네 집에 대한 뚜렷한 그리움을 갖지 못한다. 소년의 엄마가 상경하여 이모집을 방문할 때마다 이모집에 같이 가야 한다는 단호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소년은 안암동에서 과천까지 예정에 없던 단기여행을 치러내야 했다. 그나마 소년의 마음을 이끈 것은 이렇게라도 이모를 뵈어야 한다는 이유가 컸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모는 소년에겐 일종의 어머니 역할자였음은 분명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성장기 시절을 매일매일 돌봐주었던 사람이었다. 열악했던 환경에서도 아이의 성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하실 수 있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분이었다. 소년이 성장한 후 가끔 만날 때면, 항상 소년의 현재를 아쉬워하시면서, 그것의 일부는 본인의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시는 듯했다.


이모의 아이들 4녀 2남은 나름대로 모두들 잘 성장하여 제 몫을 하는 어른들이 되어갔고, 큰 이모는 특유의 알뜰함으로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살림을 키워나가셨다. 동생과 언니는 많이 다른 듯했으나 닮아 있었다. '아이들을 자신들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필요한 교육은 아끼지 않고 지원하는 것'은 두 자매의 명확한 공통점이었다. 육 남매 중 막내아들이 마지막으로 출가(장가)하는 날, 이모는 소년에게 마음이 공허하다고 하셨다. 육 남매를 키우고 시집/장가를 보낼 수 있었던 원천은 35년간 국민학교 교사가 벌어다 주는 월급 외에, 삶의 모든 어려운 순간을 지켜내고 이겨낸, 이모의 육신과 영혼이었다.


이모 나이 65세. 삶이 어느정도 안정적인 수준에 도달했을때 파킨슨병이 찾아왔고,  마지막 15년을 그 병으로 고통받았다. 초반 5년은 본인 힘으로 걸음걸음이 가능하셨으나 이후 10년은 근육이 완전히 상실되는 과정이었던 듯하다. 억척스러운 육 남매의 효성과 기적에 대한 이모부의 바람을 뒤로하시고, 80세에 본인이 평소 예비하신 그곳으로 떠났다.


소년은 이모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곳까지 함께 했다. 어머니의 요청이기도 했고, 이모의 육남매 형/누이들의 부탁이기도 했다. '너는 이모가 얼마나 네 생각했는지 반도 모른다.' 장례식 첫날, 교토 사촌누이는 소년의 두 손을 쥐고 길고 깊게 흐느꼈다. 소년이 이모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 한국에 머무를 여건이 되었던 것 등 간단치 않은 우연이 겹친 결과여서, 사람들은 소년을 보며 이모를 좀 더 그리워했다. 서울로 떠난 지 50년 만에, 고향마을 뒷산으로 돌아오신 이모를 모시는 장례식은 다채로웠다. 날은 적당히 흐렸고 일꾼들이 지칠 즈음 간간히 비가 내렸다. 지난 일 년간 굽은 허리를 이끌고 틈이 날 때마다 과천 이모집을 방문하시던 소년의 어머니는 마지막 장지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으셨다.


이모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 소년의 어머니는 병원 간이침대에 누워 신문을 들썩이는 아들 손을 이끌고 '과천에 가자' 하시며 병원문을 나섰다. 소년의 어머니는 급성간염 증세로 잠실 근처 큰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입원 중이신데, 오늘 굳이 가셔야 돼요?' 소년은 의아했다.


'평소에 너 혼자 가보기 어렵고 발이 안 떨어질 텐데... 오늘 아니면 큰 이모 다시는 못 뵐 게다.' 소년의 어머니는 중얼거리듯 소년을 다그쳤다.


소년은 급성간염으로 얼굴이 검게 변한 어머니 손을 잡고 지하철역까지 닿은 강변 둑을 걸었다. 천천히. 어제까지 큰 비가 왔고 강변 둑 너머로 뿌연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강변 둑 아래 한강에 닿는 지류는 폭우를 받아낸 흔적이 역력했다.


'비가 다시 올 수도 있는데, 택시를 타는 게 어떨까" 소년은 제안했다.


'10분 걸으면 닿을 데를 굳이 택시를 탈 필요 없어. 이렇게 걸으니 좋네' 그녀로부터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은 그날 깔끔한 침대 위에 누워계신 이모를 뵈었다. 뼈와 가죽만으로 이뤄진 그런 형체였다. 사람을 못 알아보신다는 말씀과 달리, 이모는 소년의 눈을 정확히 보셨고, 신음 같은 몇 마디를 뱉으셨다. 10년 동안 이모를 보살펴온 사촌누이는 소년과 그녀의 이모를 위한 과일을 깎으시다가 눈물 한줄기를 보이셨다. 평안한 웃음 중에, 갑자기 눈에 물기가 차올랐고, 한참을 참으시다가 한번 깜박일 때 커다란 줄기가 되어 뚜둑 떨어지는, 그런 눈물.


이모네 집을 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모 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니는, 이모 볼에 자신의 볼을 한동안 맞대고 몇 마디를 귀 속으로 전하시고, 방문을 나오셨다.


'이제 되었다.  더는 고통스럽지 않으신 게 좋겠는데, 이제 얼마 안 남으셨어.'


'그걸 어떻게 아셔?'


병원으로 돌아가는 전철 창문으로, 사촌누이가 흘렸던 큼지막한 눈물방울만한 빗방울이 후두둑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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