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어설펐던.
대학교에 들어간 소년은 정상적인(학업에 충실하고, 미래를 계획하여 그를 위한 준비를 착실히 수행하는) 학생이 되지는 못했다. 스스로 기대치에 못 미치는 학교와 전공학과 입학으로 귀결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소년의 엄마와 이모를 포함한 주변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인 것은 분명했다. 소년도 어느 정도 자의적인 기대치는 갖고 있었던 터라 외부의 실망에 대해 자신도 동의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고3 담임선생은 엄마 대신 상담하러 온 이모한테 원하는 대학교에 원서를 내는데 동의하기 위해 소정의 대가를 요구한 것 같았고, 이모는 제 피붙이가 아닌 것을 위해 소정의 대가를 지불할 형편은 못되었다. 소정의 대가를 요구하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소년은 알지 못한다. 담임선생님과 이모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상담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소년을 불러 일갈한 몇 마디는 지금도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모님 말고 어머니는 상담하러 안 오시나?
-예
-아무리 이모님이 정성을 다해도 그렇지, 자식새끼를 생각하는 마음 하고는 틀린 기라. 에이. 그러니까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 아이가. (이 대목에서 담임선생님은 들릴 듯 말 듯 말하였으나 마지막 문장은 명확히 소년의 귀에 닿았다.)
-... 네. 어머니는 시골에 계셔서요.
-알았다. 내가 보기엔 내가 정해주는 학교로 가는 게 맞을 것 같다.
-....
담임은 본인이 보기에 안정권으로 보이는 학교를 지정하여 통보했고, 이모는 그 학교도 좋은 학교니 가서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여기건 거기건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다독거렸지만,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아야 할 깊은 곳에서 벌어진 다독임은 그만큼 깊고 긴 아쉬움으로 남았다.
1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간, 소년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건물 바깥에서 빈둥거렸다. 봄 목련과 개나리가 캠퍼스를 꽉 채우고도 넘쳐서 학교 담장 밖과 골목에서도 봄 목련과 개나리는 지겹게 피워 올랐다. 학교 설립자가 잠든 묘가 학교 안에 있었는데, 주위로 넓은 잔디밭이 가꿔진 덕분에 그곳은 비적응/부적응 학생들이 막걸리와 파전과 새우깡과 김치 정도를 들고 몰려드는 일종의 안식처와 같았다. 소년은 그곳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해 3월 그곳의 봄 햇살과 살랑이던 봄바람은 일종의 고정된 서사처럼 소년의 머릿속에 아주 강력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해 그 봄 하면 그 햇살 그 바람이 아/직/ 느껴지는... 그런 고정된 느낌). 슬퍼서였을까? 기뻐서였을까? 외로워서였을까? 행복해서였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극과 극으로 만나 버무려진 몇 안 되는 인생의 한토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설립자가 잠든 둥근 묘의 서쪽 향에 허리를 기대어 앉기를 좋아했다. 그곳이면 정오의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었고 서쪽으로 해가 기울 쯤이면 햇살은 찬란했던 정오의 공격성을 상실한 채 안온하게 그 터를 감싸 안았다.
그러다가 조금 지칠 무렵인 3월 말 어느 날, 맘에 맞는 동기와 같이, 여러 동아리들이 모여있는 학생회관을 1층부터 4층까지 남김없이 돌아보기로 했다. 무조건 문을 두드리고 사람이 있으면 들어가 보는 식이었다. 한 동아리 미팅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둘이서 낄낄거렸다. 한번 들린 후 두 번째 다시 들리게 된 곳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노래하는 동아리였다. 딱히 어떤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어울렸던 교회 선배들을 통해 익히게 된 몇 가지 노래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동아리 방에는 선배 한 명이 담배를 입에 문 채 거칠게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라기보다는 'stroke'에 더 가까웠다. 말주변이 그리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고 (자신이 방을 지켜야 하는 시간에) 걸어 들어온 신입생이 둘 다 무뚝뚝한 남학생인 것을 아쉬워하는 듯 했다. 선배는 '아주' 간단하게 동아리 소개를 끝내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책을 들추며 혹시 아는 노래가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겉표지는 진한 빨간 색이었고, 이미 많이 헤져서 책이라기보다는 도망가려는 페이지들을 억지로 모아놓은 종이무덤 같은 것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한 눈에도 인쇄, 커팅, 제본, 테이핑 모든 게 조악해 보이는 책. 담배를 문 선배는 두 신입생이 알만한 노래가 있는지 페이지를 뒤척이면서 자신들이 작년에 직접 만든 책이라고 소개했다.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안에 있는 노래를 전부 다 작사/작곡했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담배를 문 선배가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소년은 테이블 위의 종이 무덤에서 제법 많은 노래를 자신이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금관의 예수, 아침이슬 등은 80년대 중반을 거치고 후반에 들어서면서 웬만하면 다들 읊조리는 노래였던 터에, 소년이 다니던 교회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일부 대학생 선배와 몇몇 머리 굵은 고등학생들이 청년부실에 모여 간혹 불렀던 노래들이 종이무덤위에 있었다. 가령 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 오 주여, 작은 연못, 친구 등등 김민기의 노래들과 흔들리지 않게, 우리믿음 치솟아, 가라모세 같은 노래들이었다. 소년은 그 동아리방을 방문한 첫날, 담배를 문 선배의 'stroke' 연주에 맞춰 서너 곡의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곡을 부를 때는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는 것을 느끼고 일부러 숨을 반만 내쉬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간단한 이유로, 설립자의 묘지가 더 많은 학생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할 무렵, 흰색 목련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할 때, 대학이라는 곳에 왜 왔을까? 하는 질문이 가슴속에 그렁그렁하도록 넘쳐서 더 이상 혼자 주어 담기 힘들어졌을 때, 그 동아리를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자기 방 없이 지낸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학생운동은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제법' 대중화되어 있었고, '제법' 조직화되어 있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사회적 정의를 외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공간'이라는 신화가 학생들과 기성세대들에게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탐구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학생들이라는 표현은 진부한 레토릭이었지만, 일부 기성의 간절한 바람 혹은 전술이 녹아든 결과일 수 있었다.) 각 동아리들과 각 학생회는 '잠재적 민주주의자'인 신입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제법' 검증된 경험과 매뉴얼을 갖고 있었다. 물론 어설펐지만.
80년대 후반기였다. 졸업 후 계획이 없거나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들 중 일부는 학생운동의 터전이 되는 학생회관에서 생활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곳에서 생활한 대학생 대부분은, 결과적으로는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은 대학생 대부분과 비슷한 형태로 졸업하고 취업하고 사회로 나아간다. 끝은 어차피 하나로 이어진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엔 조금은 다른 길로 가보고 싶은 욕망이나 치기가 발동한 것 같기도 했다.
학생 시절의 깨우침이나 정치적 경험을 좀 더 긴 인생의 경로로 이어가는 경우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 빈번한 시절이었으나, 어떤 경우에도 쉬운 결정은 없었다. 학생운동 혹은 졸/업/후까지 연결되는 '사회운동'이라는 영역에서 한 단계 깊이 혹은 높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름 엄밀한 기준으로 선정되고 선택되는 과정과 종국에는 개인의 굳은 결심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정을 거친다. 2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소년에게도 그런 경로 선택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소년은 의아했다. 왜 나를?
아마 소년의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할 정도로 다른 공간에서 이미 기성의 정치행위를 수행하고 있던 선배들이 동아리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후배들의 간단히 얘기만 듣고 ‘트레이닝’ 대상으로 점찍었던 것이리라. 트레이닝 이래 봐야 학생들이 하는 트레이닝의 한계를 가진 이상 특별할 건 없었다. 아주 많은 양의 독서를 단시간 내에 집중해서 돌파하는 것, 주제별로 단락이 지어질 때마다 나의 의견을 명확히 하는 것, 그 지식과 토론의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 현재를 비춰보고 잘못된 것을 찾아내고 잘못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그 누구의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논리력으로’ 제시하는 것… 이 행위를 2년 정도(대학교 3학년 말까지) 해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고 나서 결정적으로 그 시절의 경험을 인생의 경로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임계치를 넘어서는 행위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학과/전공을 거의 포기하고 전체 학생회의 간부로 등판하는 것, 서울지역 및 전국단위 협의체를 리드하는 행위자가 되는 것, 군대는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거나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것, 위의 모든 행위를 통틀어 집행유예 2년 이상의 ‘빨간 줄’을 획득하는 것 등이다. 소년은 2년 정도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독서행위와 토론 행위에서 제법 두각을 나타냈다. 스스로도 조금씩 자신의 생각과 논리가 ‘탄탄’ 해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다만 그 뒤에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하나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행위에 마주칠 때마다 마지막 순간에 물러섰고, 선배들은 아쉬워했었다.
3학년 2학기가 종료될 시점에, 소년을 깊이 봐 온 한 선배의 의견으로 소년은 2년간 매섭게 진행된 독서 트레이닝 대상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제외되었다. 그 선배의 의견은 이랬다.
-소년이 술 먹으면 부르는 노래는 ‘어머니 손’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는 소년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소년이 그 노래를 잊도록 하거나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소년이 그의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존경하는지,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혹은 원망하는지.. 다만 내가 명확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소년은 노래를 저렇게 부르도록 만든 그의 어머니와 정상적이고 주동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일반적이고 논리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정리해서 합의하는 결론을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소년은 그것을 알고 있고, 어머니가 허락하는 경계 밖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정확히 그가 그의 어머니를 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정의한 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소년을 봐 오고 얘기하고.. 결정적으로 저 노래를 몇 번 듣는 동안, 혹시 소년이 집행유예를 받게 된다거나, 군입대를 거부하는 자가 된다거나, 시위 현장에서 어떤 신체적 상해를 당하게 될 경우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겠지요. 절대 일어나선 안된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머니 그 두 손에 바람이 불어와
두 손을 가눌 때
어머님에 맺힌 그 한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살아오신 그 땅에 물기 마른 그 자리에
가뭄 들고 찬 서리 치는 시린 그 바람을
어머니 아시네
비바람 몰아쳐와서 가슴을 적실 때
일으키신 손
어머님의 거센 그 두 손에
메마른 가슴 적시네
땅 일구어 꽃피고 땡볕 아래 고개 숙인
그 자리에 눈물 고이고
거친 두 손 어머니 두 손
거치를 두 손 어머니 두 손
소년은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이 군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입대일이 다가오자, 다른 방도가 없겠느냐며 별 수단이 없는 남편을 붙들고 매달렸다. 3년 대학생활의 흔적은 깊게 남아 있지 않아 정리가 수월했다. 옷이나 이불가지는 버려졌고 취사도구는 다른 자취방으로 나뉘었다. 마지막으로 소년의 방에 2학년과 3학년 동안 모여진 책들이 덩그러니 남았다. 1학년 때와 3학년. 3년 사이에 세상과 학교는 급변하여 갈 길을, 갈 곳을 잃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혁명의 철학서가 복제되듯 서술된 것들이어서 유일할 수 있는 고전 몇 권에 담긴 정의와 사상과 개념이 설 자리를 잃는 순간, 나머지 책들은 순식간에 잘 제본된 종이 무덤으로 전락하였다.
버릴까...
군입대를 위해 시골로 내려가는 마지막 날까지, 소년의 방 한가운데에는 책을 담은 3개의 종이박스가 규칙 없이 뒹굴었고, 소년은 박스를 피해 잠이 들었다. 시골로 내려가는 날, 세 개의 박스를 두 개로 추려 단단히 묶어 시골로 보내고 나머지 한 박스는 동아리 방구석 탁자 밑에 던져 놓았다. 소년이 입대한 다음날 우체부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종이 두 박스를 소년의 엄마에게 전달했다. 우체부 생활 중 가장 무거웠던 소포.
소년이 군대에 있을 때, 시골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거에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멘트나 벽돌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소나무 기둥과 볏짚이 섞인 흙으로 만든 집이 50년 이상 버티며 안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그때 화재로 건넌방 텔레비전 옆에 소년의 아버지가 손수 짠 책꽂이에 장식처럼 꽂혀있던 소년의 책도 남김없이 타버렸다.
소년의 집은 동네 다른 집보다 10평은 더 커서, 본채는 마루와 6개의 독립된 방, 좌우로 부엌과 별도 아궁이가 붙어 있던 제법 큰 독립채였다. 6개의 독립된 방 중 남으로 위치한 세 공간은 동쪽으로부터 각각 안방, 건넌방, 사랑방 역할을 했고, 사랑방은 부엌 아궁이에서 온기가 전달되기 어려워 별도 아궁이를 갖고 있는 구조였다. 북쪽으로 난 3개의 독립공간은 각각 골방(안방 뒤), 건넌방, 뒷광 역할을 했다. 추운 겨울날 북쪽의 방 3개는 남쪽의 3개의 방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고, 여름날에 사람들은 자주 서늘했던 북쪽의 3방으로 찾아들었다. 골방은 할머니의 공간이었다. 소년의 기억으로 골방은 여름 한 철 대낮에 들어가도 컴컴하고 시원했다. 그 방에 머무를 기회는 딱히 많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공간은 비밀스러운 혹은 야릇한 느낌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안방에 계셨다. 할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 할머니는 골방에 계셨다. 할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가시고 집이 전소되어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할머니는 이 골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안방에서 뻑뻑한 미닫이 문을 닫아 놓으면 모르는 사람은 그 뒤가 방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 구조였다.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그 미닫이 문은 안방의 벽지와 같은 벽지로 흡사 벽처럼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햇빛이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한 평반 정도의 작은 공간은 (소년의 눈에는 항상) 신기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 소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갖고 오셨다는 자개로 장식된 궤짝과 궤짝 위로는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솜이불이었다.
‘할머니, 이 이불은 누가 쓰는 거예요?’
‘응, 우리 손주도 크면 알게 된다.’ 할머니는 가볍게 웃으시며 답하셨다.
‘이 안에는 뭐가 들었어요?’
‘할머니가 시집올 때, 할머니 엄마가 해준 옷들, 바느질 도구들, 장신구들, 할머니가 시집오고 나서 할아버지가 사다준 이쁜 옷감들… 그런 것들’. 그 말을 하는 할머니 모습은 기쁘기보단 슬퍼 보였던 것으로 소년은 기억한다. 궤짝과 이불은 건넌방에 접하는 벽에 놓여있었다. 궤짝 옆으로는 할머니의 취미 혹은 호사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실과 바늘, 천과 수선이 필요한 옷, 새로 만들어질 옷들, 바느질 세트들이 가지런했다. 북쪽으로 난 벽에는 창호지 문이 사람이 허리를 숙이면 들락날락할 정도로 자리했는데, 컴컴한 골방으로 유일하게 빛을 전달하고 있는 구조였다. 그 창호지 문은 항상 흰색과 흰색을 가르는 문살이 선명하였다. 할머니는 항상 그 문을 등지고 앉아 바느질을 하셨다. 할머니가 바느질 하기에 그 문에서 전달하는 빛이면 충분했다.
동쪽면으로는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작은 문이 내어 있었는데, 그 문은 부엌과 닿아 있었다. 소년의 엄마는 가끔 그 문을 통해 먹을 것을 시어머니에게 전달하곤 했다. 시어머니가 통 안방으로 나오지 않고 식사하러 나오지 않고 그 방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것이 유일하고도 서로 밀약한 방법인 듯했다. 특히 소년의 엄마와 다투었을 때, 시어머니는 골방에 머물면서 불만과 호소를 토로했고, 그 문은 그 모든 토로와 반론이 오고 가는 통로 구실을 했었다.
골방에서 북으로 난 뒷문을 열고 나가면, 뒤켯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나타나고, 뒤켯의 대부분은 그 집 특유의 큰 규모의 장독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소년의 기억으로 장독대에는 50개 정도의 항아리가 크기별로 흡사 항아리 가족처럼 자리했다. 앞쪽으로 작은 항아리들이 자리했고, 뒤로 가면서 큰 항아리들이 자리했는데, 맨 뒤쪽에 위치한 항아리는 소년보다 키가 커서 무엇이 들었는지 항상 궁금했었다. 뒤켯의 왼쪽으로는 소 두 마리가 사는 외양간이 있었다. 뒤켯을 감싸는 모든 공간은 소년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가지런히 다듬고, 돌로 쌓아 올린 벽과 그 벽 위에서 높게 자리한 자란 감나무와 울창한 대나무 숲, 그 숲 뒤로 이어지는 뒷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았다. 50개의 항아리 위에 가을에는 낙엽이 쌓였고, 겨울에는 흰 눈이 쌓여 얼어붙었다. 소년의 엄마는 50개의 항아리를 채우는 일과, 50개의 항아리를 비우는 일을, 그 집이 불타기 직전까지 30년을 반복했다. 집이 불타고, 불탄 집이 장독대를 덮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그녀는 지켜보았다고 했다. 노동이 들어간 만큼 애정과 회한은 깊었던 것일까? 막상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혹시 온전히 남아 있을지 모를 항아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골방 뒤쪽 문을 열고 나가면 왼쪽으로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비슷한 크기의 문이 자리했다. 골방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골방보다 좀 컸고, 골방의 아기자기함은 없는 방이었다. 소년의 아버지의 옷가지가 벽에 주섬주섬 걸려있고, 간단한 이불채가 있었고, 간단한 사무용 탁상이 있었다. 말하자면 소년의 아버지의 공간이었고, 혹은 부부의 공간이었다. 그녀와 소년이 서울에서 돌아오던 해, 그녀의 남편은 건넌방 사이를 나눈 벽을 없애고 큰 공간을 만들어 응접실 비슷한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TV가 설치되고, 당시 이장이었던 탓에 마을을 향한 방송시설이 자리하고, 아버지의 큼지막한 사무용 탁자가 자리하였다.
사랑방은 본채의 서쪽 맨 끝이어서, 항상 서늘하였다. 소년이 아주 어렸던 시절, 사랑방은 소년의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얹혀사는 공간이었다. 소년은 누군가를 기억해낼 수 없으나, 자신의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았던, 아주 이질적인 공간이었던 것을 실루엣처럼 기억한다. 그 누군가는 사랑방 서쪽으로 난 문을 이용해서 되도록 본채 식구들과 접촉 없이 들락날락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소년은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아끼셨던 머슴 ‘아무개’가 살았다는 걸 알았다. 머슴이 머슴을 그만두고 서울로 떠날 때, 할아버지는 힘들면 다시 내려와도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머슴이 떠난 후, 사랑방은 주로 그녀 남편의 친구들, 가끔 오는 손님들, 도회지로 나간 소년의 고모가 방학 때 오면 거처하는 공간이 되었다.)
소년의 할머니의 공간인 골방 뒷문을 열고 나가면 정면으로 장독대가 보였고, 오른쪽으로 틀면 부엌 뒷문을 만나게 된다. 부엌 뒷문을 조금 지난 벽면에는 작은 사다리가 놓여있었고, 그 위로 작은 문이 위치하고 있었다. 골방이 할머니의 거주공간이었다면, 이 뒷광녕은 중요하고 귀한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몸에 좋은 것, 오래된 어떤 것들 꾸준히 모아놓고 비밀스럽게 소비하기 위한 그런 공간이었다. 소년의 엄마는 그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 공간으로 올라서거나 구경해 본 적이 없다. 시어머니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완벽하게 소유권이 정해져 있었던 공간. 이 공간은 한 번도 소년의 엄마의 소유가 되지 못한 채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 오래된 집에 머무는 동안, 시어머니가 여전히 기운이 넘치고, 꼿꼿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동안, 그 공간에 접근이 허락된 것은 소년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노쇄해지고, 사다리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한 때, 할머니는 소년에게 뒤광녕 열쇠를 건네주고 필요한 것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사다리를 올라 열쇠를 열고 기어 들어가듯 2층 높이에 위치한 뒷광녕으로 사라졌고, 안에서 소년에게 올라오라 속삭이었다. 소년은 이 집과 이 동네와 근방의 동네 어떤 곳도 자신의 공간이 아닌 곳이 없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에, 이런 공간이 자기 몰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두려운 탐험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작은 가슴을 콩닥거리며 하늘로 난 사다리를 올라, 작은 문으로 기어들어가니 작지 않은 공간과 살며시 웃고 있는 할머니가 소년을 맞이하였다. (지금으로 보자면 부엌의 천정 쪽으로 만들어진 복층구조의 위층 정도로 이해할만하다. 다만 그 시절에, 부엌 쪽은 보통은 천정 마무리를 하지 않아 대청이 다 보이도록 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찬장과 부엌 광녕 위로 이 복층 공간을 만든 것은 이 집이 유일했다. 소년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리 했던 것일까?)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소년은 몇 가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날 모든 감나무가 낙엽을 잃고 하얀 눈으로 덮일 때, 그 깊고 깊었던 밤에, 할머니는 어디에서 홍시를 담아 소년에게 전해주었는지.. 남편의 귀한 친구들이 방문했을 때, 10년 이상 묵은 인삼주와 인삼주에 맞는 마른 안주거리들이 어디서 준비되고 있었는지.. 소년의 엄마가 중요한 시아버지 손님을 준비할 때 왜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소년의 눈앞에 빼곡하지만 잘 정리된, 한눈에 봐도 누군가 신경 써서 모아놓고 정리하고 있는, 특이한 살림채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른 약재부터 잘 포장된 마른 먹거리들, 쉽게 구하기 어려운 홍시, 감귤, 곶감, 배, 대추 말린 것, 마른 인삼들, 10여 종이 넘는 다종 다기 한 과실주 병들, 할아버지 할머니 사후를 위해 미리 준비하시는 고운 삼베 뭉치, 자신들의 초상사진, (당시에는 무엇인가 잘 이해가 안된) 각종 약단지들, 제사상 준비물들, 잔칫상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각종 과자와 사탕 항아리들, 조금씩 다른 향을 풍기는 기름병들.. 할머니가 교회 가실 때 신으시던 조금씩 다른 모양의 고운 신발들..
눈에 들어오는 것보다 들어오지 않은 것들이 더 빼곡했던 공간이었고, 그것들은 아무도 모른 채 할머니에 의해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면사무소 직원과 소방대원이 어설프게 추측한 것에 의하면, 마루와 부엌 사이를 연결하는 전선이 낡고 헤져 합선이 발생했고, 거기서부터 시작한 불이 삽시간에 지붕 속, 모든 방들의 천정 속으로 옮겨 붙었다고 했다. 모든 방들의 천정과 지붕, 그 사이 공간에 밀집한 수 십 년 동안 말라온 나무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불태운 원인이었다고 했다. 먼저 안방 위 천정을 태우고, 골방 위 천정으로 옮겨갔고, 차례로 건넌방, 사랑방 천정으로 옮겨 붙었다, 천정과 지붕을 다 태우면서 기둥과 벽을 태웠다. 깨끗하게 전소하는데 불과 서너 시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집이 비어있을 때 발생한 사고여서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고, 딱히 귀중품이랄 것이 없었으므로, 생각보다 피해나 충격은 크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신식(양옥)으로 새로 지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기도 했다.
불이 난 소식을 듣고 들에서 뛰어온 소년의 엄마는 불길이 아직 살아있는 와중에 집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건넌방 쪽으로 뛰어들었다. 불난 집에 뛰어들어 갖고 나온 것은 소년이 군대 가기 전에 갖다 놓은 책들이었다. 불구덩이에서 타다 만 책보따리를 끌고 나오는 그녀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찾다. '불이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할 때 엄마가 집에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네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앞뒤 안 보고 니 책 찾는다고 뛰어들어갔을 거야'라고, 소년이 휴가를 나와 불탄 집 주변을 서성일 때 옆집에 사시는 영민이 엄마가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아들이 가져다 놓은 책이 밥 벌어먹고사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교양을 가르치는 전공서적 같은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소년의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혹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