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보내던 날
한국에 있는 친누이가 울면서 전화한 것이 2주 전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메신저 음성전화 링톤이 울릴 때마다 가슴은 철컥철컥 내려앉았다. 링톤은 한 밤이나 새벽이나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소년의 누나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과정을 소년이 되도록 상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에 약간 호전의 기미가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인공 기계를 떼어도 심장이 자신의 힘으로 다시 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간신히 머물러 있었고, 태평양을 건너 매 새벽마다 메신저에서 깜박거렸다. 그리고 수술 동의에 관한 전화가 온 후 12일째 되던 날, 소년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까닭에, 아버지가 죽을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핏기 없이 굳게 누워계신 아버지를 만났다. 소년의 어머니는 예상대로 평온해 보였다. 소년의 형제들과 아이들은 서로 숨을 죽이고, 엉겁결에 터져 나올 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를 조심하면서 소년의 주위로 모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입관식은 입관예배 형태로 진행되었다. 몇 번의 형식적인 기도와 몇 번의 찬송과 한 번의 설교가 지나간 후, 입관식장에는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남았다. 어머니는 큰 이모와 작별 인사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남편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볼로 볼을 비비고, 손으로 손을 쓰다듬어 내리고, ‘잘 가요’ 한마디를 남기시고 입관식을 나가셨다. 소년은 그녀가 그녀의 가장 곁에 있는 사람을 보내는 것을 두 번째 바라보았고, 그것은 형식적으로 일관되었고, 내용적으로 평온한 어떤 것이었다. 길게는 60년, 짧게는 중풍을 앓았던 후반 20년 동안, 이미 더 이상 사별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남겨둔 아쉬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고, 최근 5년 동안은 이미 이 사별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을 것이고, 최근 2주 동안은 대부분의 시간을 뜬 눈으로 그를 위해 깨어있었을 것이고, 이 모든 시간은 사별을 맞이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지난 60년, 지난 20년, 최근 5년, 최근 2주, 그리고 지금.
남편의 형체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소년의 엄마는 뒤돌아 입관식을 벗어났다. 60년과 그 안의 별도의 20년, 그 안의 별도의 5년, 그 안의 2주를 더 이상 채워질 수 없는 연민과 관계의 밀도로 살아온 터였다. 여기서 몇 초를, 몇 분을 혹은 몇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더 이상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혹시나 살아온다면 모를까.
그러한 시간을 갖지 못한 소년에겐 이 사별은 좀 더 무겁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그의 어머니, 다른 형제와 달리 소년이 입관식장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건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소년은 유난히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소년이 선택한 해외근무로 인해 부모와 같이 있을 시간이 남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어머니가 나가고 나서, 소년은 입관하는 사람들이 그만 나가 달라고 할 때까지 그의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깊이 울었다. 소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모를 애정 하거나 혹은 살뜰히 공경하는 축에는 들지 못하는 또 다른 일반적인 축에 속했다. 특히 아버지와는 거리감이 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족을 묶어주는 동그란 원내에 온전히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원안과 원 밖을 방황하였다. 그는 가족만을 위해 어떤 순간에도 원의 중심에서 살았던 엄마와 많이 달랐다. 개인의 삶, 자신만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족은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였다. 그의 삶은 때때로 가족이 없이도 빛이 났고, 자신의 궤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 차이를 간파했다. 그리고 소년은 이 둘을 모두 닮아갔다.
그런 사유로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상실의 아픔에 대해 소년 스스로 좀 놀랐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소년은 담담했었다. 어두운 비행기 창문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다지 애틋할 것도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우리 없이도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억이 강했다.
젊은 아버지를 그려낼수록 더 그러했다. 20년 전 시작된 중풍 이후에서야 오히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동그라미 안에 명확한 존재가 되었다. 저 몸으로 더 이상 먼 곳을 홀로 떠날 수야 없지 않을까.. 이게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공통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깊은 울음은 무엇이었을까? 포유류에게 부모의 죽음이란, '아, 다음엔 내 차례이구나.'라는, 멀리 혹은 의식 밖에 있던 죽음이 의식 안으로 현실화하는 계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지켜주었던 에미와 애비, 항상 거기 있을 것 같던 에미와 애비가 불가항력적으로 상실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
항상 소년을 안타깝게 했지만, 지금 이곳에 누워있는 저 사람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소년을 있게 하는데 자신의 인생의 상당 부분을 소진한 사람이었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시간의 한 단계 앞에서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나를 이끌던 존재였다. 이 존재를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시곗바늘이 덜컹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는 것, 자신과 죽음 사이를 완강하게 버텨주던 버팀목이 드디어 사라지고 다음 차례 시곗바늘이 덜컹거릴 때 자신이 죽음의 눈금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이 시공간에 남은 이 씨앗/종의 최상위에 자기 자신이 올려져 있다는 깨달음은 자신과 죽음이 이제 맞닿아 있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남은 종이 떠나는 종을 보며 슬퍼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라고 소년은 울면서 생각했다.
부차적으로는 기회의 상실에 대한 막급한 후회도 있었다. 제 부모가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는 고전의 문구에 소년은 감동하지 않았다. 그건 제대로 가정이 갖춰지고 운영된 상태에서 효의 개념이 제대로 교육된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한 수준의 예의이자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생물학적으로 이어진 존재의 상실이라는 것이, 어떤 크기와 질감인지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는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주의를 주었던 것임을, 상실을 통해서만 비로소 꺠달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피할 수 없는 비극'이다. 제 에미/애비가 떠나버리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무기력 상태가 되는 것임을 왜 이제 알게 하는가? 이 무기력과 상실감은 지속적으로 남은 자들에게 찾아든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소년과 형제들은 하루 내내 아버지가 쓰시던 방을 비워내고, 어머니 혼자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했다. 아버지 것은, 그녀가 원했던 대로, 마지막 1년 동안 사용했던 선글라스와 중절모 한 개만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