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아버지를 보내고, 그녀와 소년은 천방산에 두 번 올랐다. 그녀의 시댁과 친정집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는 높지 않은 산. 산행은 그녀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며칠 후면 아들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렀다. 그녀는 왜 천방산에 올랐을까? 우측으로 보면 그녀의 고향마을이 보였고, 좌측으로 보면 그녀의 시댁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눈앞에 놓였다. 한 사람의 70 평생이 펼쳐진 공간은 왜소하다 못해 헛헛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날. 아버지가 계시던 방. 깨끗해진 침대에서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소년이 물었고, 미국행에 실어 보낼 몇 가지를 준비하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소년 : 어머니 인생에 하이라이트는 언제였어?
그녀 : 하이라이트?
소년 : 응 제일 좋았던 때
그녀 : …. 글쎄..
소년 : 아버지 첨 만났을 때? 내 대학교 갔을 때? 손주 봤을 때?
그녀는 질문을 흘리듯 담아두었다.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고, 속으로 생각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 특유의 방식이다. 언제였을까? 제일 좋았던 시절은…
그녀 : 지금이 지일 좋네.
이런 대답은 쉽게 예상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늙었고, 간염으로 많이 쇠약해졌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니와 20년을 돌봐왔던 남편을 연달아 보내고 난 후였다.
소년 : 왜?
그녀 : 이제야 맘이 편해졌어. 이제 아들 손잡고 산을 올라도, 하루 한두 시간 일을 안 해도, 안 부끄럽네 이제. 왜 그리 욕심 사납게 살았던지.. 이제 더 바랄 게 없으니 맘이 편해. 하루하루 가는 게 아쉬워. 진작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을.
소년 : 후회해?
그녀 : 한 가지. 니들 어릴 적 도회지로 내몬 거.. 내가 정말 잘못한 거야..
소년 : 그래도 그 덕에 머리들 깨어서 잘 자리 잡았잖아?
그녀 : 아녀. 그때 그냥 내가 품에 두고 키웠어야 해. 다 내 욕심이었어. 내가 품고 보듬고 있었어야 해. 얼마나 큰 영화를 누리겠다고. 꼭 같이 있어야 했던 시간을 버렸어. 그래서 니들한테 고마워. 크게 안 틀어지고 잘 커줘서. 힘들었지?
그녀가 소년에게 위로를 건넸다.
소년 : 그러니까. 왜 그러셔야 했을까? 다른 집들처럼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여기서 다녔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고등학교 때 대전이나 서울로 나가고..
그녀 : 이상한 바람이 불었던 게지. 네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어 갈 때 즈음에, 이상한 바람이 크게 마음속에서 불었어. 단 하루라도 빨리 너를 이곳에서 내보지 않으면 기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평생 이 힘든 농사일을 짓게 된다.. 그런 급한 마음이, 두려움이랑 겹쳤던 거지.
소년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왜 유독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과 달리 그런 마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을까? 이건 그녀에게 물어서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니라, 이제부터 찾아야 할 숙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 : 아무리 그래도 시골이라는 터를 떠나려면 쉽지 않았을 텐데.. 낯선 곳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기란 어려울 거라는 건 분명했잖아..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까?
그녀 : 너를 데리고 나갈 수 만 있다면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은 없었을 거야. 데리고 나가는 게 내가 너에게 해줘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거지. 다른 집들이 아이에게 좋은 거 해먹이고, 밭농사 짓는 거 알려주고 하는 게 아이에게 해줘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나는 너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는 게 너에게 엄마로서 해줘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소년 : 그게 현실적으로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 된다 해도?
그녀 : 응.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일까 싶었지. 산 목숨이고 사지가 멀쩡한데 자식새끼 굶기기야 할까, 풍족하게 먹이지는 못해도 굶지 않고 살아갈 자신은 있었던 거지. 그렇게 살다 보면 네가 잘 성장할 테고.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결심이 들어선 거야.
소년 : 그 성장은 너무 멀리 있는 것일 테고, 내가 잘 성장할지는 불확실한 건데..
그녀 : 여기서 크는 것보다야 낫겠다 싶었어. 단순했지.
소년 : 여기서 크는 것보다야 낫겠다 싶은 것 때문에 그 많은 시간을 우린 그렇게 살아왔던 거네.
그녀 : 미안했네.
소년 : 나한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지 뭘. 덕분에 그래도 나는 남들보다 일찍 도시생활 시작했고, 어쨌든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다만 어머니가 나 때문에 어렵게 보낸 시간, 고생들을 생각하면 내가 그만큼 되돌려 드리기 어려우니까 내가 미안한 것이지. 오히려 후회되지 않으신지 여쭤보는 것이에요.
..........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엔 솔직한 아쉬움이 짙게 배였다. 그녀는 아직도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면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의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소년도 그녀의 이 침묵을 예상한 터였다.
자신과 자신 세대의 삶을 포기해서, 자신의 후세대가 더 잘 되는 것만을 바라는 삶.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이유이자 목적인 그녀와 그녀 세대의 삶.
자식도 어찌 되었건 타인이었거늘,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아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소년의 마음을 읽은 듯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 : 내가 지금 제일 무서운 건 혹시나 치매 이런 거 걸려서 니들한테 부담 주는 상황이 되는 것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니들 맘고생, 시간 낭비, 돈 낭비하게 할 생각 하면 그냥 끔찍한 생각이 들어. 그래서 지금 이런 피리도 불고, 면사무소에서 하는 요가도 신청하고, 산책도 하고 하는 것이야. 혹시나 내가 치매라도 걸리면 내가 먼저 알아챌 것이니, 그 담부턴 난 찾지 말어.
소년 : 그렇게 자식들한테 부담주기 싫은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소년을 보시고 웃었다. 내일이면 소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딸과 아내가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년은 누운 채 천정을 보다가 엄마를 보다가, 베개에 누웠다가 엄마의 허벅지에 누웠다가를 반복했다. 엄마의 허벅지는 더 이상 포근하지 않았다. 엄마의 허벅지는 차마 머리를 올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게 마르고 늙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그저 대어보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베고 누었던 허벅지를 기억했다. 여름날 바람은 토방 위로 올라와 마루를 거쳐 누워있는 소년의 이마를 스치고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때 엄마의 허벅지에서는 향긋한 살내음이 났었다.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엄마의 온몸은 약간씩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손가락이, 손목이 끊임없이 떨린다. 그 떨림이 몸 전체로 파동처럼 이어졌다.
‘엄마, 이거 멈춰봐’ 소년은 그 예전 소년처럼 엄마에게 말했다.
‘늙었지. 늙었으니 이러는 거지. 늙어서 이러는 건 당연한 거지. 급성 간염 치료하고 나서부터 더 심해지는 것 같더라.’ 그녀는 웃으면서 소년의 보챔을 달랬다. 소년은 50이 넘었고, 그녀는 80을 넘었다. 소년은 미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했고, 자신과 엄마를 돌아보았다.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소년은 10살에 고향마을을 떠나 서울로 나아갔다. 소년의 두 딸은 비슷한 나이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나아갔다. 방법과 형편은 조금 달랐으나 ‘조금은 더 나은 곳에서 자식새끼들이 성장하고 교육받아, 나보다는 좀 더 나은 형편에서 한평생을 살게 해주자’라는, 일종의 집념이자 목표는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녀로부터 소년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소년이 지금 다니는 직장에 입사할 때를 생각해보면, 십 수년 후 미국 주재원 신분으로 근무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소년이 일하는 분야는 새로운 기술과 사업모델을 시도하는 분야여서, 전통적으로 제조업의 핵심인 상품/판매/생산부문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근무할 기회를 갖는 것은, 회사 생활 중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중 하나로 여겨졌던 시절이었다. 특히 미국, 유럽은 시장의 중요성이 높고 삶의 질도 보장받을 수 있어서, 나름 경쟁이 치열했고, 일부 선택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들 했다.
소년이 지금 회사로 이직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해외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이직했다는 것은, 실제 주재원 발령을 받는 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신규 사업을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에게는 너무 허무맹랑한 목표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혹시나 경쟁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소년의 어렴풋한 목표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차량 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 기능/서비스가 보편화한다면, 그다음은 두말할 것 없이 미국에서 팔리는 차에도 이런 기능이 필요할 것이라고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한국에서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
한국에서 그 서비스는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소년은 그 이후 곧바로 글로벌, 특히 미국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그룹에 포함되어 시장조사를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북미법인 현지인들과 비로소 업무협의를 개시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미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최고 경영층의 승인을 받고, 2011년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미국 현지법인이 위치한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때 그의 큰 아이는 중학교 1학년,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주재기간 5년이 지나서 큰 아이는 대학에 진학했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한국으로 복귀해서 학업을 수행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아이가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경제적인 사유로, 작은 아이를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은 쉬운 의사결정이 아니었다. 지인들의 의견도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여기 방식으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자기에게 더 맞고 더 나은 곳으로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둘째 아이가 의견을 또박또박 전달하는 순간, 모든 것은 결정 나있었다. 아이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찾는 것은 소년이 몫이었다.
아이와 아내는 미국에 남겨두고 소년은 혼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부족하지만 현재의 직장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있는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가장 리스크가 작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4년간 혼자 한국에 머물렀다. 퇴직금을 미리 신청하였고, 간간이 대출받을 수 있는 자금을 월 급여에 합쳐서 미국 가족들에게 부쳤다. 송금한 금액이 생활을 유지하는데 많이 부족하다는 아내의 메시지는, 직접 닿지 않아서 더 서글펐다. 일종의 낭패감이었다. 그런 낭패감이 들 때면 원룸 오피스텔을 나서서 한강변을 따라 한없이 걸었다.
4년을 지나는 동안 소년은 미국의 가족을 단 두 번 방문했다. 상하이를 거쳐 오고 가는 비행기 편을 선택하면 국내항공료의 60% 수준으로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어서, 두 번 다 그 비행기 편을 이용했다. 상하이 공항에서 6시간 정도 머무른 후 비로소 LA행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었다.
둘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진학하기 위해, 아이답지 않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상위의 대학들에는 기본적으로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지원하기 때문에, 최종 판단에서는 아이들의 특별활동, 수상경력 등이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었다. 아이는 일찌감치 첼로를 선택했고, 학교와 남부 캘리포니아 대표 오케스트라에 포함되어 연주했다. 아이의 첼로는 한번 바뀌었다. 중학교(7학년)에 오를 때, 아이들용 첼로에서 어른용 첼로로 바꿨다. ‘일반적으로’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혹은 지역 대표가 될 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첼로로 바꿔야 하는데, 아이의 첼로는 그때 바뀌지 못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이는 부모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아이는 더 열심히 했고, 전미 고등학생 오케스트라에 포함되어 연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신이 첼로가 부족해서 특별활동 성적이 안 나오고, 그로 인해 진학하고자 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첼로로 인한 책임이 불거질 것을 아이는 걱정했던 것 같다.
아이의 대학교 발표가 예정되어 있던 날, 소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으나,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라인 발표가 예정된 1시를 지나 두시가 되었을 때에도, 아이와 아내로부터는 기다리던 전화가 오지 않았다. 2시 15분 즈음에 직원들로부터 사무실 밖에 ‘소장님’을 찾는 손님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로비에는 아이와 아내가 울음을 참아내기 힘든 얼굴로 서 있었다.
‘우리 아이, 잘 되었구나. 그지?’ 그들을 보자마자 소년은 그들의 방문목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응, 아빠’ 소년의 아이는 비로소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빠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조금, 아주 조금 아빠 품 안에서 흐느꼈다. 소년은 한동안 말없이 아이를 푹 안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아이의 어깨너머로 아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당신이 고생이 많았네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같은 말을 전했다.
“만약 잘 안됐으면, 첼로 못 사준 게 평생 한이 될 뻔했는데… 고맙다. 이쁜 딸” 소년은 진심으로 이것이 가장 안심이 되는 포인트였다. 조금 전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빚을 내서라도 사줘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곱씹고 있었던 터였다.
‘내가 그럴까 봐, 더 죽기 살기로 공부했지..’ 아이는 눈물이 담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삶이 소년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소년은 자신의 삶이 아이들에게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르는 그곳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것 같아 그리로 떠나는 삶은 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제 소년은 알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에게 행복했을까?'에 대한 답은 ‘소년,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인생에 행복한가?’와 같은 답일 것이다. 소년은 이제 그 답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