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참 오래 다녔다.
초등(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6년, 대학원 2년, 두 번째 대학원 1.5년을 다녔으니 도합 21.5년, 내 인생의 절반이 넘게를 학생으로 살았다. 이렇게 계산을 해 보니, 새삼 그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중 의무 교육 9년(내가 고등학생 때는 고등학교가 아직 무상 교육이 아니었다)을 빼도, 어쨌든 내가 선택해서 학교에 있었던 시간만 12.5년이다.
이쯤 되면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만도 한데, 마지막 학교를 졸업한 지 정확히 10년 만에 나는 또 학생이 되어 혼자 먼 영국 작은 마을에 와서 앉아있다.
한국 사회의 평균적 삶(그런 게 있다면)에 비추어 보자면 다소 늦은 나이일지도 모른다. 가족, 파트너, 친구들, 익숙한 공간, 괜찮은 벌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취미.. 감사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안정적인 삶의 조건을 뒤로하고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영국에 온 첫날, 앞으로 최소 3년 나의 집이 되어 줄 기숙사로 들어서자 갑자기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 눈앞에 펼쳐진, 5평 남짓한 화장실 딸린 방. 부엌은 공용이다. 그나마 10년 전 미국에서 학생으로 살 때보다는 나아진 것이 있다. 개인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꽤 큰 위안이 되기는 한다.
나는 내가 학구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느리게 이해하는 편이라는 생각을 오래 해 왔다. 공부에 딱히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시로 얕고 깊은 자괴감에 빠지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하고, 너무 큰 부담감에 책을 펼치지 못해서 자책하다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일을 반복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 와중에 이 길 위에서 버티도록 해 주는 유일한 작은 빛은, 그렇게 수렁에 빠져서 한참 허우적대다가 겨우 뭍으로 기어 올라와 읽고 쓰기 시작하는데 일단 성공하면, 놀랍게도 재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직선인지 곡선인지 모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재미는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재미는 생각보다 강렬하다. 예전에 꽤나 공감했던 말이 있는데, 재미가 곧 재능이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말에 기대어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확신하지 못한 채로, 재미를 붙잡고 조금 더 가 보기로 한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당장의 벌이를 잠시 뒤로하고, 필요조건이 아닌 수많은 충분조건 중 하나일 뿐인 공부를 하겠다고 훌쩍 나라를 떠나올 수 있는 조건이라는 건, 그런 결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과 파트너와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하고 운 좋은 일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삶의 조건과 이야기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기 때문에,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에 압도되어, 너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힘을 빼고, 작은 것 하나씩 가볍게 해 나가자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지만 원래도 완벽주의적 기질을 가진 나로서는 그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너무 잘하려 애쓰기보다는 작은 것 하나씩을 배우고 그 모든 배움을 축하하며 촘촘히 기록해 보려고 한다.
잘 모르겠고, 자주 흔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흔들림까지도 남겨 두고 싶다.
이건 어쩌면, 나를 다독이기 위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여기까지 온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