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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Apr 10. 2019

이어폰 없이 밖을 나섰다

리플레이 없는 단 한 번의 소리를 만난다



오늘은 이어폰 없이 길을 나섰다. 이어폰이 망가진 언니에게 내 이어폰을 가져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꽤나 긴 오늘의 여정에서 이어폰이 빠진다는 것은 지루하고 어색하고 심심한 일이 되겠지만, 언니만큼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베푼 호의였다.


언니는 방 안에서 종일 음악을 틀어놓고 지내는 사람이다. 새로운 노래와 오래된 노래 모두를, 그루브한 노래와 홀리한 찬송 모두를 즐기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런 언니에게 <로우 배터리>, <고장 난 이어폰>과 함께하는 외출 길은 생각보다 더 지루하고 별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어폰 없는 오늘의 외출이 모두 언니를 생각하는 기특한 동생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따금 음악 없이 밖을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세상의 소리에 대한 주의력이 필요해질 때가 있다. 생각이 지나치게 복잡해졌을 때, 혹은 너무도 단순화되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그때이다.


현관문이 닫히며 들리는 도어락소리를 들으며 건전지를 갈아끼워야겠단 생각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신발의 무게를 문득 깨닫는다. 버스정류장의 잠시 후라는 소리는 버스 어플을 켤 이유를 사라지게 하고 매번 혼자 외치는 줄 알았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 “네에” 대답하는 기사님을 마주하게 한다.


버스에 나란히 앉은 어르신들의 요즘 걱정은 무엇인지, 시끄럽게만 들려오던 라디오가 생각보다 재밌고 유익하단 걸 알게 된다.


이어폰 없이 나선 세상은, 이토록 살아 있고 나는 그 가운데 지난 새벽의 악몽과 오래도록 머물던 시름을 잊는다. 여전히 들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집중된 소리도, 아름다운 멜로디도 아니지만 이내 허공에 흩어져버릴 단 한 번의 소리들. 그것들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영감이 되어준다.






당신의 인디, 가랑비 @garangbimaker
/매일 한 문단을 남깁니다.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를 출간했습니다.


4월 20일 북토크에 당신을 초대해요.

https://www.instagram.com/p/BvluBdID9jp/


오늘 자정,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개정판 텀블벅 마감됩니다.

https://www.tumblbug.com/sentenceandscen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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