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명웅의 딸, 한정선
나의 아버지, 당신에 대하여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나의 아버지
소아마비로 걸음마저 불편한 아버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습니다. 독한 진통제 같은 소주 한 잔에 땀방울을 안주삼아 훔쳐내며 한평생 건축 현장 막일로 자식을 키워내고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40대의 젊은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막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뜨거운 여름날 술에 취해서인지, 해에 그을려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빨간 얼굴이 되어 들어오는 날이 잦았습니다. 거기에 더 취기가 오르면 어린 저에게 소주 심부름을 시키고는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엄마가 바가지를 긁으면 대번 고성을 지르고, 그래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때면 물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손찌검은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울음을 삼켰지만, 중학생이 되어서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모습을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 밖을 나갔습니다. 동네 천변에 앉아있거나 서성거리며 아버지가 주무실 시간이 되어서 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술을 드신다고 매번 그리 악한 주정만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오동잎 한 잎 두 잎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서 조용히 신세 한탄을 하시거나 저를 업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아빠 술 좀 마시지 않으면 안 돼? 아니면 조금만 마시면 안 돼?
기분이 괜찮아 보이시는 날에는 아버지께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땡볕에 그을려 벌겋게 살갗이 벗겨진 어깨를 움찔거리며 대답하셨습니다.
마시지 않으면 일할 수 있간. 막일하는 사람들은 술 안 마시면 고통스러워서 일 못 해. 다 술기운에 이 악물고 모래 지고 벽돌 지고서 올라 다니는 거지….
그러고는 돌아누우셨습니다. 아버지의 어깨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술은 아버지의 고된 삶의 진통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기억은 마흔이 조금 넘은 저에게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되는 아픈 장면입니다.
소아마비로 걸음마저 불편한 아버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습니다. 독한 진통제 같은 소주 한 잔에 땀방울을 안주 삼아 훔쳐내며 한평생 건축 현장 막일로 자식을 키워내고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힘없는 여든의 백발노인이 되어 호통 한번, 된 술 한 잔 드시질 못합니다. 80대의 아버지는 너무나 애처로운, 보고 있어도 그리운 아버지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장녀인 제가 건장한 청년을 만나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라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남편을 만났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께서 더 잘 이해하시지 않겠냐며 허락을 구했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한 세상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내 자식마저 고생하며 사는 건 못 보겠다며, 처음으로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아픔이 그제야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삶이 고달팠을 아버지. 그런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 나라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못난 딸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원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16년이 흐른 지금은 누구보다도 사위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잘한 것 하나 없는 못난 딸은 지금의 제 나이였을 젊은 날의 아버지께 참 미안합니다. 나와 같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봤다면 그 고달픈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아서 손주도 안겨드리지 못했습니다. 알 길 없는 고생길을 지나온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공과금이나 조금 보태는 딸에게 미안하다고 더워도 추워도 그저 아끼느라 고생이십니다. 옛날의 불같은 호령은 온데간데없고 세월 앞에 쓰러진 고목처럼 쓸쓸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당신이 앞으로 몇 해나 더 내 곁에 계실까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가슴이 저립니다. 상상되지 않는 당신의빈자리이지만 점점 연약해져 가는 어깨, 힘없는 목소리를 볼 때면 그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옛날 세련되지 않고 투박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나도 큰 사랑이었다고 이제야 느끼는 자식은 표현조차도 서툽니다. 그 아빠의 그 딸이라고. 아버지 닮아 무뚝뚝하단 핑계로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차마 입으로 뱉지도 못합니다. 자식은 아무리 애를 써도 평생 자식인가 봅니다. 도무지 갚을 길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더는 갚을 기회조차 없을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부지런히 표현하지 못하는 걸 보면요.
아버지가 드시던 술이 그리도 싫었던 딸이 이제는 먼저 반주라도 하시라며 좋은 술을 사다 드리지만, 아휴- 이제는 못 마셔! 하시는 당신을 마주할 때면 너무도 서글퍼집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40대, 50대, 그리고 60대를 오직 자식을 위해 사셨으니 이제는 이 부족한 딸의 효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버지. 오래 계실 거지요. 아버지의 찬란한 삶은 지금부터예요. 자식 걱정, 먹고사는 걱정, 다 내려놓고 자식 손 잡고 좋은 것 먹고 좋은 곳 구경하러 다녀요. 인생은 60부터라니 아버지 이제 스물, 꽃다운 청년이시잖아요.스물에 누려보지 못한 것들 모두 보고 담고 누리셔요.
아버지, 부를 아버지가 곁에 있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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