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최인기의 딸, 최희진
나의 아버지, 당신에 대하여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나의 아버지
아빠는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빠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현관문을 나서던 아빠가 나를 빤히 보더니, 같이 갈래? 하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같이 갈래?
이 말을 끝으로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어린 나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시험을 못 봐도 혼내지 않았고 학원을 빼먹어도 화내지 않았다. 무얼 해도 예쁜 우리 딸, 예쁜 내 딸이라며 엄마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어린 나는 그런 아빠가 좋았다.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일은 사람을 무한히 긍정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아빠의 바람대로 밝고 씩씩한 성격으로 자랐다.
그러던 1997년 어느 날, 아빠가 하던 무역 사업이 부도를 맞았고 집에는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외박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던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들이 길어졌다. 남겨진 가족들은 아무도 없는 빈집인 것처럼 불도 켜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켜지도 못한 채 숨죽여 지내야 했다.
빚쟁이들도 지쳐 더는 찾아오지 않을 때 아빠가 돌아왔다. 빚쟁이들이 내지르던 고성이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갔을 때 나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고성이 잦아진 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기로 하면서였다.
그날 밤, 내 손을 붙잡고 울던 엄마를 기억한다. 아빠를 따라가도 된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너는 아빠 딸이기도 하지만 엄마 딸이기도 하다면서 우는 엄마를 나는 그저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마저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며칠 뒤 하교 후, 혼자 집에 있던 나는 짐을 싸기 위해 온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는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빠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현관문을 나서던 아빠가 나를 빤히 보더니 '같이 갈래?' 하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아빠를 따라가면
난 엄마와 이별하게 될 거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몇 초간 눈을 맞춘 뒤 아빠는 현관문을 나섰다. 그 후로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아빠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들은 많았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아꼈다. 이따금 반드시 아빠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때면, 무역업을 하는 아빠를 남겨두었다. 그렇게 아빠는 내게 온전히 잊은 것도 기억하는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아빠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빠가 살아있는지는 궁금했다. 살아있을까 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었을 때, 이질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아빠가 온전히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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