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박후식의 딸, 박수진
나의 아버지, 당신에 대하여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나의 아버지
어릴 적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달리, 그의 출근길에는 검은 양복도,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구두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꼭두새벽에 하루를 시작했고 이따금 우리를 두고 타지에 나갈 때면 몇 개월씩 귀가하지 못했다.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쩜 이렇게 어려운지. 모든 순간이 처음이라 생경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훅훅 와 닿는다. 어떤 날엔 꽉 잠긴 파우더 뚜껑을 따는 일조차 수월하지 않아서 시큰거리는 손목과 떨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그런 날엔 퇴근하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서먹하고 어설픈 안부가 오가고 음성엔 언제 또 올 거냐는 아빠의 질문에 나는 기약이 없는 대답을 한다. 통화 끝에 그는 밥 굶지 말라고, 나는 술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로서 인사를 대신한다. 서로의 목소리를 통해 그 문장을 듣고 나면, 우리는 당분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집에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아빠와 많이 소원해졌다. 사실은 내가 일방적으로 아빠를 미워했다.
벗은 양말을 늘 그 자리에 두는 사람.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눕는 사람. 엄마와 내가 없으면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 우리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술을 너무 가까이하는 사람. 오랜만에 마주하는 밥상에서 늘 공부하란 말만 늘어놓던 사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재수하기를 바랐던 사람. 졸업을 하고 나니, 공무원 공무원 노래를 불렀던 사람. 무엇보다도 엄마의 존재와 역할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던 당신이 미웠다.
나는 타지에서 내 안의 아빠와 십 년 넘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지옥철을 감당할 수 없어서 탔던 출근길 첫 차에서 예고 없이 다가온 아빠의 무게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아주 조금씩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달리, 그의 출근길에는 검은 양복도,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구두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꼭두새벽에 하루를 시작했고 이따금 우리를 두고 타지에 나갈 때면 몇 개월씩 귀가하지 못했다. 뜨거운 계절에는 빨갛게 익은 피부를 식히다 잠들기 바빴고 꽁꽁 얼어붙는 계절이면 높은 혈압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집을 나서야 했다. 가끔은 싫은 술자리를 견뎌내야 했고 끊었던 담배 냄새를 수도 없이 삼켜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남은 마지막 붕어빵과 어묵을 모조리 사 와 우리 앞에 펼쳐놓았던 당신은 유독 아내에게 표현이 서툴렀다.
나는 정말 못된 년이다. 그런 당신을 알면서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속에 숨어 외면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 내 안의 가둬두었던 아빠가 아닌,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똑바로 보고 싶다. 엄마의 청춘만 아쉬웠던 게 아니라, 아빠의 청춘도 더없이 빛날 수 있었다고. 타지의 좁은 여관방에서 어린 처자식을 그리워하며 몇 달의 밤을 지새웠을 지금 나와 같은 나이의 당신에게 정말 고생했다고. 서툴지만 여전히 노력하고 있으니, 부디 조금만 더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어 달라고.
나는 그렇게 엄마의 나이를 지나, 아빠의 나이로 달려가고 있다.
책 구매하기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넓고 깊은 아버지.
자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위안이 될
단 한 권의 책을 만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