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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24. 2021

오늘이 아쉽지 않은 이유

하얗게 비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내일의 문장들

   내게 한 해가 흘러갔음을 실감하게 하는 달은 12월이 아닌 10월이다. 10월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 첫 책을 낸 달이다. 10월 31일. 나는 그날이 핼러윈데이라는 것도 모르고 (상관이야 없지만)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두 번째 생일로 정하였다. 


   기다리는 방학도 아름다운 꽃이나 짙은 녹음도 없는 시월을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좋아할 만한 가시적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은 시월을 향한 나의 애정을 더욱 굳건히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때론 어깨가 으쓱해기도 했다. 그러다 ‘첫 책’을 낸, 작가라 불리게 된 ‘첫 경험’을 안겨주었다는 분명한 이유가 더해지니 시월은 내게 짙은 애정과 동시에 자라난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달이 되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나온 일들과 사람들을 반추하듯이 시월이 오면 나는 지난 문장들을 들춰보며 스스로의 작업을 돌아본다. 누구도 검사하지 않는 나만의 숙제,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나만의 감사가 시작되는 거다. 


   참 잘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해가 얼마 없는 것처럼 참 잘 썼다고 자축하고 싶은 글들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근사한 표현들이 있다 싶으면 조금 느끼한 것 같고 질서 정연하게 다듬었다 싶으면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썼기에 마음에 들었다 여겼던 글도 다시 보면 너무 제 자신에게만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남들도 궁금할까 의심스러워진다.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본 글도 마찬가지다. 내면에 대한 성찰은 빠진 관찰기에 불과한 글처럼 허전한 구석이 만져진다. 


   “그래도 이제 일 년 더 썼잖아.”


   괜찮은 성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심하며 쓴 글들은 시월이면 언제나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조금은 익숙해졌다 생각했던 쓰는 삶은 다시금 낯설어진다. 그러나 조금도 괴롭지 않은 낯섦이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느슨해진 마음을 팽팽하게 당겨내는, 다정한 사투를 허락하는 낯섦이다. 이 감정이야 말로 나로 하여금 시월을 더욱 안달 나게 하 사랑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밖에는 모르던 내가 체념보다는 수용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문장들을 품게 된 것은, 글쓰기에는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수려한 문장을 쓰는 신예를 꿈꿔본 적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어느덧 6년 차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지 않지만 누구나 알지는 못하는’ 작가가 이곳, 시월에 서있는 나의 자리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애매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결코 쉽지 않았던 고마운 자리이다. 이대로 충분하다 여길 수는 없지만.


   한때 더 많은 이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욕심에 조급하던 날들이 있었다. 한 줄도  쓰고 싶지 않은 날에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타닥타닥 거친 소리를 내며 억지스럽게 글을 썼다. 다음날이면 흔적도 없이 지워질 글들을 기어코 써야만 안도하던 시절을 시끄럽게 지나면서 천천히 깨닫게 된 게 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즐비해있지만 내가 평생에 쓰며 살기로 한 글만큼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신보다는 의심이 더 자라나는 순간에 필요한 것은 당장의 수습이 아닌 시간의 여백이라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를 자책하기보다는 삶의 안팎을 오래 들여다보는 여유가 더 나은 문장들을 데려온다는 사실은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기대를 보태는 일 없이 그저 오늘은 오늘의 문장을 쓰는 결단을 내리기 시작하자, 더는 오늘을 아쉬워하지 않게 됐다. 


    깨끗하게 비운 새 날들 마주하며 나는 나의 이십 대의 마지막 시월을 보내줄 것이다. 지난 여섯 번의 시월을 돌아보며 참 잘 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 싸워왔다고는 말해줄 수 있다. 불확실한 밤들을 지나고 환한 아침을 마주할 준비를 하며 나는 이제 나의 서른의 문장을 조금 앞서 기다린다. 그때 거기의 시월에 나는 어느 자리에 닿아 있을까 하는, 배꼽이 찌릿해지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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