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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24. 2021

길을 내는 일

한 권의 책을 왕복하며 읽는 이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 책을 덮는 대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독서 습관이다. 일독만으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지극히 취향적인 책에만 국한되는 습관도 아니다. 책의 종점에서 하차하지 않고 다시 기점으로 돌아가 또 한 번 책 속에 고개를 파묻는 여정을 왕복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나 역시 수풀이 무성하고 곳곳에 자갈과 바위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곳에 길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은 비할 데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즐겨 찾는 비유는 길을 내는 일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오고 다시 서로 다른 곳으로 가는 이들이 잠시나마 한데 모여 같은 여정(독서)을 떠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길을 내는 일이 곧 쓰는 사람의 일이라 믿는다. 앞서 길을 내는 이에게는 잘 닦인 길을 따라가는 이들은 결코 모를 무수한 고민과 계산이 있다. 숱한 밤과 낮이 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시끌벅적한 군중 속에서 오롯이 홀로 내는 길, 쓰고야 마는 글이 우리에게는 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 그야말로 투자 대비 고효율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낮과 밤의 자리를 미동도 없이 지키며 몇 줄의 문장을 건져내는 삶의 의미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창밖의 세상이 규칙적인 모양으로 굴러가는 동안,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붙들며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땅을 맨발로 거닐며 거친 들풀을 맨손으로 뜯으며 내는 길, 그 위에 과연 얼마의 걸음들이 오고 갈지 알 수 없어 기대보다 앞선 두려움을 마주하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마치 그러기를 위해 태어난 듯이 눈을 뜨면 쓰기 위해 걸었고 눈을 감기 전이면 쓰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날들을 선물처럼 때로는 숙제처럼 보냈다. 


   하나의 길을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의심과 확신의 걸음을 반복해야 하는지를 알기에 나의 길은 물론 누군가의 길을 쉬이 지나올 수가 없다. 삶의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글이라는 길을 택하여 인도하고자 했을 그 목적지와 그 여정에 정성스럽게 심어놓았을 다양한 의미들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진다. 처음은 서두름 없이 다음은 조금 더 깊숙이. 이것이 내가 한 권의 책을 왕복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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