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랑비메이커 Oct 24. 2021

무엇이 되지 않은 것들

내게로 와서 글이 되는 것들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으세요?”


   이 물음 앞에서 조금 더 확신 있는 답을 내리기 전까지 나는 수많은 예술의 조각들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철회하기를 반복했다. 영감이라는 단어, 내 문장의 근원을 묻는 말에 조금 더 신중했어야 마땅했겠지만, 조금 더 그럴듯하게 보일만 한 선택지들의 유혹을 떨쳐내기란 언제나 어려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이왕이면 닮고 싶던 모양의 창작물이 답이 되었으면 했다. 오랫동안 아껴 온 노래들, 너무 자주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과 넋을 놓게 만들던 그림들. 그것들을 듣고 읽고 보며 정말 새로운 창작 욕구를 태우기도 했다. 어느 한 편으로는 ‘난 언제쯤 이런 걸 남겨볼 수 있을까.’ 싶던 것들을 영감이라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글이 그러한 작품들과 어깨를 (조금은) 가까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과 어설픈 기대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펴낸 책들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누군가의 음악과 책, 그림에서 나의 글이 시작되는 일은 줄어들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삶을 살며 조금 더 전투적으로 조금 더 집요하게 세상을 읽어가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창작물에 얼마나 많은 은유와 의도가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러운 흐름, 유연한 감상보다 앞선 창작자의 세계관이 촘촘하게 세워진 체계가 바로 하나의 창작물이다. (사소하게는 점 하나를 찍을까 말까 하는 사사로운 고민을 내가 하듯이, 수많은 고민과 선택을 통해 마침내 완성되는) 노래 한 곡, 영화 한 편, 책 한 권에는 분명 마음껏 사유할 틈과 영감이 있지만 그것이 창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하나의 예술을 마주 볼 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감뿐만 아니라 영향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하자 나의 글은 더는 누군가의 무엇, 누군가가 이미 오밀조밀하게 만들어 세계 앞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들에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집 앞 산책로에 난 작은 하천의 윤슬, 서로 다른 키의 나무들, 오후 4시의 그림자. 지하철 역을 오가는 수많은 걸음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이의 뒷모습.’


   어느 것 하나 그대로 머물러주지 않고 무엇도 완전히 움켜쥘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시작하고 맺을 것인지, 누구를 쓰고 누구를 지울 것인지 전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부터 끝나는 이야기가 이곳, 무엇도 되지 않은 것들 앞에서는 가능했다. 도처에 널려 있어 조금도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던 곁을 스치는 모든 풍경이 사실은 매일 내게 부지런히 말을 걸고 있었다는 걸, 몇 개의 스위치를 끄고 나서야 알았다. 


   글이 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할 때면 복잡한 영감을 찾아 표류하는 대신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나선다. 목적 없는 산책을 하며 작은 돌멩이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도 하고 바위 사이에 낀 이끼들을 문질러보기도 한다. 어느 날에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보라색 가디건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며 그가 지나왔을 청춘의 그늘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함부로 결론 내지 못할 것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나의 가장 안쪽에 숨어 있었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 나는 조금 더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나의 영감은 아직 무엇도 되지 못하여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들, 그리하여 아주 활짝 열려 있는 문과 같은 장면들에서 나의 문장들이 시작된다고. 



*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뒹그르르, 은행.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들 중에는 내가 말없이 응원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까 누구도 온전히 혼자도 함께도 아닌 것. 나는 그것을 가장 안전하게 느낀다.’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은행알을 보며 쓴 글의 첫 문단이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겨우 바닥을 뒹굴던 은행알, 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테지만.

작가의 이전글 연중무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