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뜨겁게 여물었던 계절
오늘로써 이틀에 한 번 한 달에 열두 번의 글감과 에세이를 나누는 <일상이 문학이 될 때>의 시즌 1막을 내렸다. 5월의 시작부터 7월의 마지막까지 꼬박 3개월 간 서른네 명의 멤버와 서른여섯 개의 글감을 나누며 자그마치 이백칠십여 편의 글을 읽었다. 내가 구십 번의 피드백 메일을 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밖의 계절이 뜨겁게 여물어가는 동안 내 삶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글을 나누며 뜨겁게 여물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삶의 전반이 긍정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는 내게도 하나의 부작용이란 게 있다면 조금 외로워졌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삶은 때때로 작은 탄성과 함께 조금 과하다 싶을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마주해야 한다. (환상에 가까운) 기대감 혹은 무관심 속에서 이십 대의 절반을 보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간극 속에서 나는 편하지 않은 관계를 붙들기보다는 쓰는 삶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마다 휴대폰 대신 작은 노트를 펼쳤다. 당장 누군가를 마주하는 대신 언젠가 닿게 될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나눌수록 가난해지는 대화도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였다.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이 되고 싶은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시인을 꿈꾸던 학창 시절과 문학이 좋다고 고백하던 것도 나 하나였던 국문학과 재학 시절에도 나는 늘 활발한 아이이길 자처했지만 옅은 외로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섞일 수는 없게 하는 기름과도 같은 감정을 오래 지니며 살았다.
때로는 크고 작은 오역과 오해를 방패 삼으며 외로움을 안전함이라 느끼기도 했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구나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홀로 써낸 글의 목적지는 (가능하다면) 수많은 이들의 삶이라는 것이었다. 고독한 시간을 앓으며 써낸 글들이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가 필요했다. 삶의 해석을 자유롭게 주고받고도 가난해지지 않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 그것이 글쓰기 모임의 시작이었다.
이틀에 한 번 글감과 마중 글을 나누고 돌아오는 글들을 살뜰히 읽는 일, 몇 문장의 마음을 보태어 보내는 일은 분명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버스 안에서 떠오른 생각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문득 그리워진 얼굴들, 집 앞 산책길에서 발견한 작고 동그란 풀의 촉감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오래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내게 더 많은 걸 내어주었다.
하나의 글감에 서로 다른 향과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린 삶의 조각들은 고요한 일상에 다정히 말을 걸어주었다. 그에 힘 입어 계속해서 쓰는 계절을 보냈다. 외면되지 않을 거란 믿음으로 쓰는 글에는 이전과는 다른 경쾌함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오래된 외로움에 대한 오래된 응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조금은 설익었을지 몰라도 이토록 솔직할 수 있을까 싶은 글들을 읽으며 어느 밤은 쉬이 잠들지 못하기도 했다. 어느 서점에서도 찾을 수 없고 누구나 읽을 수 없는, 처음이라는 은밀하고도 수줍은 고백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사무치게 감격스러울 적이 많았다. 부서지기 쉬운 계절의 탈진을 막은 건 이 같은 특권이었을 거다.
마지막으로 제출된 에세이들 중에는 나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혀준 글들이 있었다. 길지 않은 글들을 몇 번이나 읽으며 조금 울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나와 닮아 있는, 서로를 조금 더 깊이 읽어줄 이들이 남아있다.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너무 늦지 않게 마주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을 작은 눈덩이를 굴려가듯 키워가며 다름 아닌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삶을 사는 내가 근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