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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24. 2021

짧고 옅은 비

해갈을 위해 필요한 건 길지 않은 비

    7월이 가고 8월이 시작됐다. 유월부터 진득하던 더위는 제 몫을 다 소진해버렸는지 몇 차례 짧은 비가 내리고 나니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다. 이제 더는 목덜미에 젖은 머리카락을 긁어내며 일어나지 않는다. 한낮의 거리를 땅만 보며 걷지 않지 않는다. 눅눅한 밤공기를 탓하며 잠 못 드는 날들이 서서히 줄고 있다. 조금 이른 건 아닌가 싶은 입추를 지나며 정말 가을이 오는 걸까 하는 기대로 밖을 나서면 서운한 매미들이 아직 바깥은 여름이라며 힘차게 울어대는 중이다. 산책길에 난 작은 하천을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 버린 여름의 생명력도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짧은 옷과 높게 올려 묶는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별 수 없게 만드는 계절은 여전히, 뜨겁게 진행 중이다. 이 여전한 계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는 건 이따금 내리는 짧은 비다. 

   장마가 사라진 여름은 어항 속을 헤엄치는 듯한 불쾌함 대신 타들어 말라가는 듯한 열기를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누군가는 장마 없는 여름이 성가시지 않아 좋다고 할 테지만 나는 마른하늘을 보며 언제나 비를 기다렸다. 


   이동할 때마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는 일과 축축하게 젖은 바짓단과 소매 끝은 내게도 성가신 일이다. 그럼에도 마땅히 해오던 일이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달리던 일, 우산을 사는 돈이 아까워서 편의점 안 냉방에 몸을 덜덜 떨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던 일. 비가 온다고 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식구들과 집으로 가는 길에 떡볶이를 포장해 갔던 일. 성가셨지만 불평만 할 순 없던 소소하고 소중한 일들이 그리웠다. 연신 덥다! 만 반복하는 여름보다는 이따금 비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 추워! 할 수 있던 여름이 더 지루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기다리던 비를 젖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낮은 강수율도 한 몫했지만 적은 비마저도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그 탓에 비가 왔다는 사실은 까맣게 젖은 주차장 바닥을 보며 짐작하거나 매일같이 검색하는 날씨를 보며 알았다. 내리는 비에 우산을 펼치기보다 무작정 뛰어들고 보던 어린 시절을 지나온 내게는 마른하늘의 여름이 조금은 서운하지만 몇 차례 내린 짧은 비에 누구보다 반가운 마음으로 남겨진 여름을 지나는 중이다.


   요즘 조금 덜 덥지 않냐는 인사말에는 비가 와줘서 그래요, 아주 짧은 몇 번이었지만요. 하고 답한다. 어제보다 조금 시원해진 기운에 눈을 뜬 아침이면 가장 먼저 베란다로 나가 젖은 주차장을 내다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저 몇 차례 짧은 비면 된다고. 


   "갈수록 메말라 가는 세상에 비를 내리고 싶어서요." 가랑비메이커. 열일곱의 내가 조금은 유치한 필명을 입은 채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이유를 오랜만에 떠올려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토록 호기롭던 결심이 지나치게 거창한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곤 했다.


   그러나 이 여름을 버티게 해 준 짧은 비의 흔적을 바라보며 더는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해갈을 위한 비는 꼭 긴 장마가 아니어도,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몇 차례 짧은 비면 된다고. 애초의 나의 꿈은 가랑비, 딱 그만큼의 위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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