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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24. 2021

어린 날의 허기증

허기를 채우는 문장들을 믿는 일

가족들 몰래 그 일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나만의 일을 가졌다는 것과, 가족들에게 비밀을 가졌다는 것으로 매일매일 아슬아슬하리만큼 긴장했고, 행복했고, 그리고 고단했다. -박완서 ‘중년 여인의 허기증’ 

 

   마흔에 ‘아무튼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박완서 작가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중년 여인의 허기증’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 없이 별안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허기가 한국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녀의 쓰는 삶의 시작이었다.  1,200장의 원고를 빼곡하게 채운 첫 소설이 단번에 문학상을 받은 천재적인 문학성에 감히 비할 수는 없겠지만, 불붙듯이 찾아온 글에 대한 허기와 그를 채우며 느끼는 아슬한 긴장감과 오묘한 기쁨은 1970년 봄, 마흔의 전업주부 박완서 작가에게도 2015년 가을, 스물셋의 나에게도 세월과 세대를 넘어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으리라 확신한다.


    스물셋.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도 전에 첫 책을 냈다. 끝을 알 수 없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썼던 이야기들이 첫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느꼈던 감정은 포만감은커녕 이전보다 더 큰 허기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책을 처음 펼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페이지 위 활자들을 제대로 마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누가 고쳐 쓴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낯설었고 고심하며 고른 단어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로 무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이 책 하나가 아직 쓰이지도 않은 앞으로의 글들을 단정 지을까 겁이 났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아니, 더 잘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 다시 고요하고 고독한 시절을 견뎌야만 한다는 게 겁이 났다. 그러나 쓰지 않는 삶으로 걸어 나가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번 터져 나온 내 어린 날의 허기를 조금이나마 채워나갈 수 있는 건 글쓰기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복학과 함께 예정되어 있던 실습도 취업도 마다했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 박완서 / 중년 여인의 허기증" 


   다른 대안의 삶을 포기했다고 해서 쓰는 삶이 당장에 선명해지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더 큰 허기를 느끼기도 했다. 내적인 허기뿐만 아니라 삶의 궁핍의 위기도 몇 번 안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썼다. 가난한 시절에는 가난을 재료 삼아 쓰며 가난한 문장들이 추억이 되어 희미해질 날을 기다렸고 뜻밖의 풍요가 찾아오면 야금야금 아끼고 아껴 오래 머금기 위해 썼다. 가진 것은 원래 없었고 할 수 있던 선택지도 반납해버린 나의 가장 젊은 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빈손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그 누구보다도 절박한 진심으로 나아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박완서 작가의 말처럼 그 열심히라는 게 언제나 재능 부족, 끊임없는 허기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스물셋에서 어느덧 스물아홉. 매일 새로운 아침과 낯선 감정들을 수습하듯 애쓰며 나아왔지만 여전히 내게 내일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오래된 허기와 함께 찾아온다. 나는 여전히 가난에 가깝고 내 글은 여전히 그늘진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부족함이 더는 부끄럽지 않다. 어린 날의 허기는 여전히 젊은 날의 허기로 이어져 어쩌면 영영 포만감이란 모른 채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나는 이 허기가 나를 조금 더 부지런한 글과 삶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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