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조금 줄여볼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애매한 순간들에 대한 대처

by 가랑비메이커



애매한 순간들에 찾아오는

분명한 감정들



때때로 우리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을 만나곤 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속도 없이 번번이 정규직 계약에 쓴 맛을 봐야 했던 당신에게 "여전히 인턴 중이야?"라고 묻는다면 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미 그 일로 가족들과 서로 한바탕 상처를 던져주고 난 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면, 그를 붙잡고 울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쿨하게 웃어넘겨버리고서는 깊은 상처 하나를 또 품고 돌아서야 할까.





가끔은 속 시원히 화를 내버리면 좋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애매한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그런 순간들을 직면하고는 한다. 마주 앉은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과 웅얼거림이 그렇고 (쌍둥이 언니와 함께 동승했을 때에는 그 시선과 웅얼거림을 마주할 확률은 더 높아진다.) 이를 피하고 싶어 꺼내 든 휴대폰 화면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타인이 그렇다. 그냥 참고 가기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고 버럭 화를 내기엔 너무 예민한 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의 나는 안락한 자리를 포기하고 나와버린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을지라도 가지고 있는 짐꾸러미가 결코 가볍지 않을지라도 기분이 상하는 일보다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게 낫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내가 나열한 순간들을 보며 "그게 왜?" 라며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거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왠지 불편스러운 순간들. 사람들은 저마다 애매한 순간에서 서로 다른 감정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에 우리는 얼마나 능숙한 대처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도망쳐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상황을 모면하는, 내 영역과 상대의 영역 모두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감정들을 지켜낼 수 있을 만한 능력. 나는 그와 같은 상황들에서는 주로 피하거나 삼켜내는 편은 택했지만 말이다.





음악을 조금 줄여볼까

누구도 다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법



얼마 전에 서울에서 아는 작가님을 만났다.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비슷한 시기를 겪는 중이라 그랬는지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인 대화를 위해 우리가 간 곳은 고요한 카페였다. 테이블 간격이 너무 가깝거나 멀지 않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각자의 작업이나 독서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와 음악이 잔잔해서 나중에 와서 조용히 작업하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고 이제 막 알게 된 사람들의 대화였기에 우리는 조금 흥분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고요한 공간에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크진 않을까 싶던 찰나에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그때 냅킨과 함께 나온 비석에는 작은 문구가 써져 있었다. "모두가 편안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조용한 대화를 부탁드립니다."


아차 싶었던 터라 우리는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소리를 낮췄다. 그러고 나서 순간, 엄청난 소음과 함께 테이블 위의 보조 배터리가 떨어졌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소음의 진원지를 확인하려고 했고 우리는 마치 혼이라도 내달라는 표정으로 직원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직접적인 대화보다도 부드러운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었는지 왠지 이곳의 룰을 지켜줘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다치지 않으셨나요. 조용히 해야 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미소를 머금은 직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음에는 꼭 작업거리를 가지고 이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요를 찾던 내게 담요와 함께 따듯한 물을 건네준 부분이 한몫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한 무리의 손님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목청껏 떠들어대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문을 하는 과정에서 걸쭉한 표현들과 수다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던 나는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자신들만 큰소리를 내며 떠들고 있다는 걸 모를까'


그래도 착석하고 나면 조금 조용해지겠거니 기대를 했지만 되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카페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마주 보는 곳에 앉은 그들 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흘러갔다. 그 바람에 나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몇 번 놓치곤 했다. 나는 어서 그들이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를 바랐다. 그들이 비석에 새겨진 안내 문구를 보고서 조금은 목소리를 낮춰주기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대는 기대였을 뿐. 음료가 나오자 각자가 주문한 음료를 가져가기 바쁠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두들 응시하는 시선 없이도 그들을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자꾸 직원을 향했다. 조용해야 하는 건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는 했어도 안내 문구를 넣어둘 정도였으면 그 공간만의 룰이 있을 텐데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하는 마음으로.


표정에 큰 변화가 없던 그는 작은 일거리를 하며 그 테이블 주변을 서성였고 조금씩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체격도 좋은 그가 다가가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금방 조용해질 거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지나칠 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자릴 옮겨야 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때 카운터로 돌아온 그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카페 내에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음악을 조금 줄여볼까."


그 말이 떨어지자 카페 내 음악은 조금씩 작아졌고 이윽고 큰 소리로 떠들던 그들 역시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인상을 팍 쓰며 "제가 가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할까요." 했던 나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그들이 달리 보였다.


그들이라고 해서 큰 소리로 떠들어야지, 하며 작정하고 떠든 것도 아니었을 거고 안내문구를 보고도 무시한 것이 아니었을 거다. 단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고 카페 안 음악소리에 묻혀 자신들의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다.


잦아드는 음악 소리에 붕 뜬 자신들의 소리가 민망했을 거고 차츰 공간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되었을 거다. 그저 한 시간 전쯤의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나는 이 점을 간과한 채 그저 얼른 저들이 나가줬으면, 아니면 우리가 나가버려야지, 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고 동시에 그 누구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카페의 분위기와 룰을 지켜낸 그가 대단해 보였다. 만일 그가 내가 생각했던대로 그가 직접 테이블을 찾아가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 이야기를 들은 무리는 불쾌했을 거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불쾌함을 표출했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라고 하여도 카페에 들어온 이상 모두 손님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다른 손님들을 위해 그들에게 무어라 하기에도, 그저 가만히 있기에도 참 애매했을 거다.


"음악을 조금 줄여 볼까." 그때 떠올린 묘수가 누군가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고 손님의 영역과 카페의 영역 모두를 지켜낸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있고 나서 한 며칠은,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은 센스를 갖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매일의 삶 가운데 마주하는 애매한 순간에서 자주 그 한 마디를 떠올리게 됐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들마다의 적절한 한 마디를 잘 찾아내지는 못 했다. 그저 오래된 교훈을 떠올려 보았다. 말 한마디면 천냥 빚도 갚는다고 했으니 그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게 됐다. (물론 되려 만 냥의 빚을 더 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고 불편한 순간에 섣부른 행동이 아닌 무거운 한마디를 찾아가기로 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공간,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다 보면 그들의 말 마디를 통해 나도 조금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새 매거진 < 한 마디 말에서 피는 것들 >은 작가가 일상을 살며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었던 한 마디 말의 무게에 대해 다룹니다. 무심코 허공에 뱉어버렸던 말의 무게가 누군가의 하루, 일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말과 생각, 사색에 대해 다루기 위한 공간입니다.









매일 책을 쓰고 영화를 읽습니다.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삶으로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는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와 블로그를 통해 구매 및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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