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니가 잘 될 줄 알았어

식어버린 포옹과 허공에 던져진 말들에 대하여

by 가랑비메이커

절실한 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소원하며 살지만 사실 가장 절실한 것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곳에, 눈치채기 어렵지 않은 모양으로 말이다.


배우에게는 한 명의 관객이
뮤지션에게는 한 명의 청중이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작가에게는 한 명의 독자가
늘 절실하며, 큰 버팀목이 된다


배우에게는 그 꿈을 실현시켜줄 감독과 무대도 필요하겠지만 그가 가진 재능을 여과 없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관객이 가장 절실할 것. 뮤지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곡과 작업실 보다도 힘이 되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에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아줄 한 명의 청중일 거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렇다. 좋은 기획력, 훌륭한 마케팅을 갖춘 출판사가 있다면 좋겠다만, 그런 것들이 없어도 한 줄의 문장을 놓지 못하고 가슴에 새겨줄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멋진 출발이 될 거다.


관객과 청중, 독자가 가장 절실한 이유는 진실된 <시선>을 보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눈 가득 무대 위 배우를, 한 줄의 문장을 담아낸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을 줄 안다.


다가와 많은 말을 해주지 않아도 고요히 두 손을 모으며 함께 호흡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이자 현실이 되어버린 여정을 계속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바닥으로 내리 꽂힌 마음과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른 마음 모두 다잡아 줄 힘이 그 시선,에 있다.




시선 없는 포옹

식어버린 표정



요즘 들어 관계에 대한 생각이 잦아졌다. 갈등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소란스러운 시간들을 지나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되려 속만 시끄러워지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 내 카카오톡 채팅창을 열어보았다면, 울리는 벨 너머의 대화를 엿들어보았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대화는 다정하고 따스한 안부로 가득했기에. 다만, 그 목소리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걷고 있는 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됐다. 아니 발견하게 됐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함께 손을 붙잡고 우리가 언제부터 잡고 있던 손을 놓았는지, 왜 등을 돌렸으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지 그 모든 걸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때때로 각자가 일궈낸 숲에 초대될 때면 한아름 안아 들던 꽃보다도 환한 미소로 서로를 안던 우리였는데, 언제부턴가는 식은 포옹만이 의무처럼 남겨졌다.



난 니가 잘 될 줄 알았어.
정말 잘 됐다. 잘 됐어.



슬픈 일을 겪고 있는 이와 함께 아파하며 울어주는 것이 어려운 줄로만 알았다. 돌아보니 가장 어려운 것은 타인의 기쁨에 함께 웃는 것이었고 그의 내일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세 번째 책을 탈고하는 과정에서 나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얼굴들과 식어버린 포옹을 해야했다.


입술로 전하는 문장과는 다른,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 수고스러웠던 시간들을 앎에도 그 시간이 낳은 것의 무게보다도, 각자가 선 위치에만 마음을 빼앗겨 굳은 팔짱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느 누구의 걸음 앞에서도 같은 허물을 찾기에만 급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오' 시인해야만 그들은 <우리>라는 범주를 열어주었으며 자신의 늪과 그늘을 타인의 삶에서도 발견하기만을 바랐다. 동시에 자신이 가장 먼저 그 늪을 헤어 나오기를, 그늘을 벗어나 홀로 빛 가운데 서기를 바란다. 시선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두고 가는 이들.


이십 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의 내 곁에도 여전히 사춘기 시절의 시선을 벗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아니 여렸을 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우리>라는 이름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았다. 내키지도 않은 고백들을 하며 그들이 함께 거짓 눈물이라도 흘려주기를 바랐고 그게 나를 외롭게 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 외로워졌다. 후회스러운 고백과 소용없는 연락처만이 늘어갔다.


글을 쓰며 책을 만드는 나로서는 출간 직후, 관계에 대한 허무를 가장 깊게 느낀다. “잘 될 줄 알았으며 수고했다”라며 요란을 떨던 이들은 뒤를 돌면 다른 이야기들을 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를 자처하면서도 내 삶이 담긴 페이지를 좀처럼 넘기는 법이 없었다.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다름 아닌 내 삶을 읽어줄 하나의 시선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그들은 그저 시선 없는 포옹을 하며 어깨너머로는 식어버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허공에 흩어져버릴 말뿐인 말들과 관계에 지쳐 요즘의 나는 당위의 말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으레 그래야만 하는 말들, 괜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말들을 멈추기 시작하니 관계는 명료해졌다. 애써 찾아가는 만남이 잦아졌고 나는 조금 더 먼 곳으로 밖을 나서게 됐다.


괜한 우연과 진부한 인사말이 없는 공간에 도착해, 나는 입과 귀를 닫고 내 안의 이야기를 쏟기 시작했다.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 돌아보면 언제나 같은 발자국, 여전한 내가 있다. 변하지 않는 내면의 소리와 그 소리들을 요란한 법 없이 가만히 제 것으로 삼아주는 시선들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현실이 되어버린 꿈과 배부른 마음을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새 매거진 < 한마디 말에서 피는 것들 >은 작가가 일상을 살며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었던 한마디 말의 무게에 대해 다룹니다. 무심코 허공에 뱉어버렸던 말의 무게가 누군가의 하루, 일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말과 생각, 사색에 대해 다루기 위한 공간입니다.









매일 책을 쓰고 영화를 읽습니다.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삶으로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는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와 블로그를 통해 구매 및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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