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 하면서 마음대로 이름표를 붙이던 사람들
사람들은 무언가 정의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면서. 때로는 그렇게 정의된 단어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신문과 뉴스와 같은 곳에서 공식적이고 합의적인 정의처럼 통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순 있어도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 마다마다에 다양한 감정과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의라는 것은 애초에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예외적인 시선보다는) 보편적인 판단에 의해 내려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우리 역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를 정의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사람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있을까. 매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타인과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눈을 뜨는 나. 어쩌면 정의와 이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돌아오는 내일이라는 존재도, 여전한 내 방 침대도 매 순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늘 같은 시간에 타는 버스라고 하여도 어딘가 다르며 늘 먹던 밥, 늘 보던 누군가의 얼굴조차도 결코 같은 감정일 수가 없다. 그건 우리가 끊임없이 사고하며 관계하며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아직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아직까지는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나를 설명한다. 존재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내가 아닌 적이 없던 나 역시, 스스로를 정확히 정의하거나 짐작할 수 없다. 때때로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니.'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가끔은 마치 나를 다 아는 양 정의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 진다. "저를 아시나요? 나도 모르는 나를요?"
나는 여간해서는 누군가 던져놓은 말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두 가지 말이 있다. "넌 너무 차가워. 겨울 같아."와 "이 썸머 같은 여자야."
두 이야기 모두 나와 잘 되지 않았던 남자들이 던져두고 간 이야기였다. 비슷한 관계 속, 상반된 이야기. 그래서 나는 겨울 같은 사람일까, 여름 같은 사람일까. 아쉽게도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른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건 그들이 남겨둔, 지극히 추상적인 저 계절들로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
"넌 너무 차가워. 겨울 같아. 앞으로는 좀 웃고 다녀. 다른 사람에게도 상냥하게 대해주고." 라며 나의 앞날과 나로 인해 상처받을 다른 누군가들의 입장까지 걱정해주던 사람. 퍽이나 고마웠어야 했는데 그 문자 앞에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가 나를 만난 건 고작 3번, 우리가 알게 된지는 이제 막 3주 정도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한 달도 채 겪어보지 않았던 이가 나를 겨울이라는, 쉽게 잊어보려야 잊을 수 없는 분명한 두 글자로 정의하다니 그의 성급한 판단이 고맙지 않았다. 그를 만나며 잘 웃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면에 많은 것들이 서로 충돌을 하던 시기였고 마음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그렇게 차가웠던가?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도로 대했을 뿐이었다. 앓고 있던 고민이 표정이나 말투로 모르는 새 새어나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겨우 세 번 보았던 그가 겨우 그 시간들로 나를 정의하려 드는 건 불쾌했다.
나 역시 그와 내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세 번을 끝으로 잘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히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 나에 대한 정의로 돌아오자 나도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너와 함께했던 몇 번의 만남에서 내가 겨울 같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었을 수도 있어. 봄여름 가을 겨울 중 겨울. 지금 나는 쉽지 않은 계절을 지나는 중이고 그걸 너에게 들켜버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착각은 하지 않기를. 너에게 겨울 같은 사람이었다고 해서 내내, 모두에게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일 거라는 착각. 모든 건 계속해서 변하고 나 역시 매일의 내가 처음이야. 내가 네 앞에서 잘 웃지 않았다고 해서 웃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
실제로 나는 그와의 대화가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돌아서면서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면 십분 만에, 그와 함께 했던 긴 시간보다도 더 많이 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나는 그가 영영 누군가와 좋은 대화를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는 자기중심적인 판단력을 믿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중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서머 같은 여자야." 외침의 주인공이다. 꽤 오래전에 듣게 된 이 말속의 썸머는 단순 계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500일의 썸머>라는 영화 속 주인공 톰이 사랑하던 그녀, 썸머를 뜻한다.
이제와 얼결에 하는 고백이지만 내가 가장 많이 보았고 애정을 갖게 된 <500일의 썸머>는 저 외침으로부터 시작됐다. 처음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는데, 그건 단순 여름 같은 여자 라는 의미쯤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후에 그 외침 속 썸머가 톰의 사랑이 아닌 다른 운명을 찾아간 썸머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배신감이란. 나의 배신감은 썸머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톰과 내게 시답잖은 정의를 내리던 그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서사는 철저히 톰의 시각에서 흘러간다. 톰이 썸머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녀를 위한 꿈을 실현하며 다시 좌절하지만 결국에는 우연히 또 다른 계절의 이름 "어텀"을 만나게 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남겨두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톰이 가슴 아파하는 500일의 시간 동안 썸머의 시간은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500일의 썸머>라는 이름으로 영화는 끊임없이 썸머라는 여자에 대해 정의를 하려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썸머가 없는 거다. 그저 톰이라는 이가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만 있을 뿐.
말이 조금 길어졌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비슷한 관계에서 다른듯 비슷한 찰나의 계절쯤으로 정의되어야 했던 나는 누구일까. 겨울처럼 차가운 사람일까, 썸머처럼 뜨겁고 자유로운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무릎을 탁, 쳤다. 어쩌면 어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톰이 스쳤던 계절의 여자가 썸머나 어텀으로 불리는 것처럼 나 역시 그저 그들과 찰나의 순간을 함께 지났던 거였다. 그저 각자의 계절과 삶에 충실히 지내다 마주 보게 되었던 그 짧은 시절의 우리였을 뿐이다.
일 년 사계절이 있는 나라를 더운 나라, 추운 나라로 정의한다면 그 얼마나 성급하고 바보 같은 판단인지. 나 역시 그렇다. 아니 훨씬 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잠시 스쳤다고 조금 열어보았다고 마치 자신이 아는 것이 모두 전부인양 정의 내리고 떠들어대어도 괜찮은 걸까.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에 대해 감히 전부 이해했다거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타인이 나를 좁은 세계로 바라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억울한 것은 없기에 나 역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새 매거진 < 한마디 말에서 피는 것들 >은 작가가 일상을 살며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었던 한마디 말의 무게에 대해 다룹니다. 무심코 허공에 뱉어버렸던 말의 무게가 누군가의 하루, 일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말과 생각, 사색에 대해 다루기 위한 공간입니다.
* 썸머를 위한 변명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수록) 을 통해 본 포스팅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매일 책을 쓰고 영화를 읽습니다.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삶으로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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