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재즈피자

수면 물빛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저녁

by 일뤼미나시옹

평화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과 접촉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을 때, 우리는 나무가 천국의 일부이며 우리 역시 천국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틱 낫한



당신은 무슨 이유로 벚나무 아래 섰는가. 당신은 무슨 이유로 벚나무를 올려다보는가. 당신이 올려다보는 담 벽에 붙은 벚나무는, 몇 해 전 법정에서 만난 여자. 사랑한 남자 친구가 만나 주질 않는다고 전화질해서 스토커로 고발당한 여자. 오죽했으랴 만나 볼 수 없는 그녀의 마음. 그녀의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던 법정에서의 뒷모습. 어디에든 기대고 싶어도 기댈 곳 없는 그녀의 뒷모습. 이 봄날에 당신이 바라본 벚나무를 나는 차마 바라볼 수 없다. 무슨 이유로 당신은 이 봄날의 벚나무를 올려다보는가. 꽃무늬 봄 치마를 들쳐보는 눈으로 올려다보는가. 어느 골목 담 벽에 서서 당신은 당신을 만나주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본 적 있는가.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벚나무에는 그런 애절한 마음이 스며 있으니, 이 봄날의 벚나무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지 알 수 없다.(Live In Tokyo/Brad Mehldau/NONESUCH)


dthumb-phinf.pstatic.net-18.jpeg


Slow GoGo를 아시는가. 슬로우 고고하면 당신의 몸은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슬로우 고고에 당신은 몸을 맡겨 보았는가. 이제는 한물 가버린 리듬 슬로우 고고, 이제는 아무도 몸 맡기지 않는 리듬 슬로우 고고, 한물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성인 콜라텍'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화장발 두터운 중년 부인의 눈빛에서나 만날 슬로우 고고. 시큼한 입 냄새 풍기며 낯짝 벌건 사내들의 건들거리는 어깻짓 슬로우 고고. 지친 나비의 날개 같은 리듬으로, 오염된 강으로 흘러갔던 뻘물의 출렁거림 슬로우 고고, 덜 말린 머릿결에 챠밍 샴푸 냄새 풍기며 통근 열차 타러 가던 흰 종아리들의 리듬 슬로우 고고, 실패한 연애 같이, 잘못 발설된 악담 같이, 몸밖으로 내보내면 쪽팔리고, 부끄럽던 리듬 슬로우 고고, 이젠 한물간 사람들의 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리듬 슬로우 고고.(We Get Requests/Osca Petersen/Verve)


목욕탕 소파 위에 솟아 오른 허연 배를 까뒤집은 채 진종일 잠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는지 알 도리 없는 허우적거림. 어디서 무겁고 질긴 피로를 끌고 와서 널브러진 몸도 아니다. 몸에는 흉터 한 곳 없고, 노동에 지친 흔적조차 없지만, 그 몸은 또한 어디에도 써먹을 수도 없는 몸이다. 희고 깨끗하고 물렁물렁한 몸은 세상에 밀려난 몸처럼, 세월을 멈추고 싶은 몸처럼, 바깥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무서워하는 몸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몸은 무슨 핑계를 대고는 사람들과의 연을 한나절 끊고, 전생에도 없었던 길고 깊은 한숨을 내뿜는다.(The Sea Ⅱ/Kertil Bjornstad/ECM)


3238784283_9249603b58_o_garbar66.jpg


(Elements of Style...Exercises in Surprise/Vandermark 5/Atavistic)

이들의 음악은 돌산을 눈앞에 두고 곡괭이로 그 산 속을 파헤치는 것 같다. 뜨거운 광맥을 찾아 곡괭이 질 하는 등짝이 벌건 사내들. 이 음반의 첫 곡. ‘Outside Ticket’은 추방된 자들의 노래랄까. 추방된 자들의 술판이랄까. 그들만의 범속치 않은 어법이 녹아들어 있다. 특히 색소폰은 황금빛의 광물질성이다. 곡괭이와 돌의 부딪침에 불꽃이 튀고, 코끝으로 따가운 먼지가 들어오는 듯하다. 등이 서늘한 해질녘에도 그치질 않는 곡괭이 질. 뜨거운 광물을 찾기 위한 근육들의 불끈거림이 보인다. 색소폰은 그치질 않는다. 지속 또 지속이다. 카뮈의 말처럼 '뜨거운 돌의 맛'이 난다. 드럼은 뒤에서 색소폰의 지속을 한층 부추긴다. 장작더미를 불 속에 툭 툭 던지듯, 숯가마에 풍로를 젓는 듯하다. 이윽고 색소폰의 뜨거움이 트롬본으로 넘어간다. 트럼본은 한결 부드러운 지층을 보여 준다. 푸석거리는 흙의 맛. 청자의 귀를 조금 쉬게 한다. 그러나 지속은 그치질 않는다. 음악은 9분 23초 동안 지속된다. 등 붉은 광부의 몸이 내 안에서 퍽퍽 곡괭이 질을 해댄다. 나의 몸 안에 뜨거운 광맥이 보인다.


여성 재즈 피아니스트 마이라 멜포드의 피아노는 남자들 보다 한층 거칠고, 윤곽이 뚜렷하다. 마티 엘리히의 색소폰은 거친 섬유질의 펄럭거림같이 장쾌하고 현학적이면서, 유머가 묻어 있다. 타이틀 곡 Yet Can Spring에서 멜포드의 피아노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일관된 어법으로 지속과 변화의 연속을 놓치지 않고, 피아노 음역 안팎으로 색소폰은 감아 돌고 외면하고, 조우하면서, 다시 튀어 오르고, 민첩하게 퍼덕거리는 물고기처럼 살아있다. 이어지는 Here Is Only Moment에서도 엘리히의 색소폰의 진가는 시들지 않는다. 오히려 멜포드의 피아노가 무색할 정도로 색소폰의 굵은 외침은 오히려 볼륨을 더 높이게 유혹한다. 마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나무 허리를 칭칭 감아 올라 기어코 꽃 피우고 마는 나팔꽃 같다. 당당하고 확고하며 물러날 때는 스스럼없이 물러난다. 감히 한 번 추천해보고 싶은 음반이다. 네 번째 The Open Retun에서는 엘리히의 클라리넷의 화려함과 멜포드의 그윽한 배경이 압권이다. 특히 The Natural World를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한 마리 물새가 되어 있을 것이다.(Yet Can Spring/Myra Melford, Marty Ehrlich/Arabesque)



커다란 수족관의 물은 검은 물이 되어버렸다. 그 속의 영덕대게들은 폐차장에 얽힌 차들처럼 뻣뻣하게 얽혀 아귀다툼 같고, 길고 바싹 마른 집게발을 허우적거렸다. 허우적거릴 때마다 영덕대게들의 고통보다 물이 더 아팠다. 바싹 마른 영덕대게들은 포개지고 늘어지고 휘청거리기라도 했지만 아우성치기라도 했지만, 물은 통째 검은 통증이었다. 제 통증 안에서 바싹 말라 가는 대게들을 키워야 한다.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은 무엇이든 죽을힘으로 껴안아야 한다. 늘어진 집게발들이 긁어대는 고통은 검은 물의 것.

(Sometime The Magic/Jane lra Bloom/Arabesque)


3808454513_12cf544759_o_garbar66.jpg

내가 신뢰하는 것은 내 자신이다. 힘이 드나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나를 위로하고 생각한다 시험 칠 때나 밥 먹을 때 컴퓨터를 할 때 싸울 때 태권도 할 때 잠잘 때 책 읽을 때 TV볼 때 국어 공부할 때 수학공부 할 때다. 사회 공부할 때나 도덕 공부할 때나 영어공부 할 때나 물고기 밥줄 때 이야기 할 때 어디 갈 때 걸을 때 운동할 때 장난칠 때 독서할 때 베낄 때, 약속할 때 더울 때 추울 때, 싫다고 할 때 좋다고 할 때 시계 볼 때 무언가를 외울 때 사진 볼 때 그림 볼 때 과외 할 때 놀려를 갈 때 이상한 생각을 할 때 나의 미래를 생각할 때 등 난 나 자신만을 믿는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염색할 때 동물을 볼 때 아니면 서점에 갈 때 그리고 무언가를 살 때 어떤 옷을 입을 때―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글(Live at the Village Vanguard/Tom Harrell/BMG)


3008385498_ae241d7d92_o_garbar66.jpg


재즈 듣기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기다. 먼지와 후텁지근한 공기 가득한 대합실. 흑갈색 유성 페인트 칠한 나무 의자의 우울함. 누구나 이런 장소에서 한 시간이면 실향민이 되어버릴 것 같은 버스 기다리기.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주는 불안과 거북스러움. 담배 연기에 찌든 벽과 흐릿한 형광등불, 그러나 가끔씩 공기 속에 터졌다 사라지는 소녀들의 꽃 같은 폭소. 어떤 화려한 삶도 누렇게 변할 것 같은 소읍에서의 버스 기다리기.(Libera Me/Lars Danielsson/ACT)


친구 딸아이 이야기다. 겨울 방학 때 찬 바람 맞으며 실컷 놀다 집에 들어왔다. 어항 속의 두 마리 금붕어를 보자니 내심으로 물고기들이 물 속에 몹시도 추워 보였다. 더운물을 틀어 어항에 담고,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뺐다. 찬물을 조금 섞어서 미지근하게 했다. 손가락 두 마디에 닿은 물의 온기에서 친구의 딸아이는 금붕어가 따뜻하게 지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는 두 마리 금붕어를 넣었다. 그날 저녁 금붕어 한 마리는 배를 뒤집었다. 아이의 마음이 손가락 두 마디에 닿은 물의 온기처럼 따뜻한 이야기다. 아무리 되씹어 생각해도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훔쳤으면 싶을 때가 이럴 때다. 아니다 훔친다 한들 써먹을 줄도 모른다.(Cool Struttin/Sony Clark/Blue Note)


toi_grand_et_moi_petit,_mais_ensemble_face__la_mer-fd0000_garbar66.jpg


묵화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 있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A Girl Named Joe/Chris Cheek/New Talent)



keyword
일뤼미나시옹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