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파스칼 키냐르
신문지 낱장 넘기는 소리 그치질 않는 도서관 잡지 코너. 겨울부터 봄까지 그의 손에서 신문지 낱장 넘기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그는 아랫단이 달랑한 감색 바지에 줄무늬 폴로 티셔츠를 입고 앉아 신문지 낱장을 넘긴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의 시간은 손끝에서 신문지 낱장 넘어가는 소리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신문지 낱장 넘기기를 멈추면, 그의 시간 또한 흘러가질 않는 것이다. 그는 매일 같이 도서관에 온다. 오늘은 깨끗이 면도를 하고 왔다. 내가 도서관에 갈 때마다 그는 신문지 낱장을 넘기고 있었다. 해묵은 신문들부터 근간까지 넘기 신문지 뭉치를 낱낱이 넘긴다. 대체로 오후 서너 시 경에는 도서관에 있는 그는 순한 눈빛을 가졌지만 삶에의 자신감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고요한 실내에 신문지 소리는 금속 조각처럼 번쩍거린다. 봄꽃들 햇살 아래 저들끼리 키득거리는 사월. 신문지 낱장 넘기는 일도 지쳐 바깥에 나가 자심 허수아비처럼 금오산 바라보며 해바라기 할 때. 왜 내 안에서 한숨이 나오는 건가. 비칠비칠 햇빛 속으로 사라지는 나비 같은 한숨이 왜.(Trasnoche/ Enrico Pieranunzi & Marc Johnson)
패션쇼가 열리는 현장의 음악들을 들어보면 하나 같이 지극히 단순 반복의 연속이며, 음과 음 사이에 휴지부가 없다. 단순 반복의 음악적 효과는 환상을 유발시킨다. 단순 반복의 청각적 굴복을 통해 환상의 눈을 가지게 한다. 반복은 굴복을 요구한다. 지속적으로 명령하고 세뇌시키는 반복. 파시스트적인 반복. 나는 패션쇼 현장의 음악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여러 종류의 힘들 가운데, 특히 음악이 미치는 힘의 한 단면을 말해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는 옆길로 새기다. 어긋나기다. 재즈에는 반복이 없다. 주제부가 있지만, 그 주제부는 변주를 낳는 무한 증식을 위한 주제부일 뿐이다. 주제부를 넘어선 변주는 무의식이다. 그러나 반복의 강요는 의식적인 것이다. 의식의 개입이 없는 연주를 하거나 그런 음악을 들을 때 우리 속에 내재된 반복의 이데올로기들은 사라진다. 우리들 일상의 굳은 의식이 이완되고 느슨해지고 때로 시인 이상의 말처럼 ‘정신이 은화처럼’ 맑아지는 것. 재즈는 현대적 개념의 살풀이다.(Solo/ Misha Mengelberg)
아서라 세상사 허망(虛妄)허다. 군불견(君不見) 동원도리편시춘(東園挑梨片時春) 창가소부(娼家少婦)야 말을 듣소. 대장부 평생 사업 연년(年年)이 넘어가니 동류수(東流水) 구비구비, 물결은 바삐바삐, 백천(百川)은 동도해(東到海)요. 하시부서귀(何時復西歸)라. 우산(牛山)으 지는 해는 제(齊) 경공(景公)의 눈물이요, 분수추풍곡(汾水秋風曲)은 한(漢) 무제(武帝)의 시름이라.
피죽죽 저 뒤견아 성성제혈을 자랑 말어라. 기천년(幾千年) 미귀혼(未歸魂)인 너도 또한 슬프련만, 천고(千古) 상심(傷心) 우리 인생들은 봄이 돌아오면 수심(愁心)인가. 낙양성도(洛陽城都) 낙화소식(洛花消息) 공자왕손(公子王孫)도 처량허고, 청춘몽(靑春夢)을 계우 깨어노니 백발 시름이 더욱 짙네. 오릉금시(吾音近侍) 은안백마(銀鞍白馬) 당시 행락이 나건마는 장안청루(長安靑樓) 소년들은 저 혼자만 자랑을 헌다.
장강(長江)으 배를 띠워 풍월(風月)을 가득 실코(싣고) 범범중류(泛泛中流) 떠나갈제, 백구비거부래(白鷗飛去復來) 뿐이로구나. 퉁소 소리가 오오(嗚嗚)허니 소자첨 적벽(赤壁)인가. 어데서 비파(琵琶)곡조, 인불견(人不見) 수봉처(水逢處)허니 소상고적(瀟湘古蹟)이 방불허고나. 젊어 청춘에 먹고 노지, 늙어지면은 못노라니라,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The Sidewinder/ Lee Morgan)
중학시절 시장 입구 병원 담벼락 아래 푸른 갑바의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며 흑갈색 도너츠를 튀겨 팔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때 아저씨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하굣길 정류장까지의 멀고 지겨운 거리와 왕성한 식욕에서 오는 허기 때문에 헐떡거리듯 먹었던 핫도그 맛. 구멍이 숭숭 난, 파우더로 부푼 핫도그의 맛 같은 바람이 불었던 기억.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가. 그 사이 내가 그 앞을 또 얼마나 지났는가. 하지만 유독 오늘 내 눈에 띈 포장마차 주인은 일손 잠시 놓고 쉴 때 하늘 올려다보던 그 옛날 그대로의 시선으로 맞은편 정육점 위의 하늘 바라보고 있었다. 중학시절 그의 얼굴은 지금 반백의 희끗한 중늙은이가 되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자고 아직도’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에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울컥하기도 하고, 내가 괜히 억울해졌다. 푸른 갑바의 포장마차 안에서 그가 겪었던 겨울바람과 여름날 장바닥의 열기와 쇼트닝 냄새와 그의 몸 냄새가 내게로 육박해 오는 것 같았다. 내 삶의 일부가 푸른 갑바의 포장마차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괜히 억울하고, 그가 바라보던 하늘이 원망스러웠다.(Largo/ Brad Mehldau)
부암아트 홀에서 강태환의 색소폰을 들었다. 소극장에서 들은 강태환의 연주는 내 평생에 어떤 재즈 연주보다 값진 경험이었다. 강태환은 방석을 깔고 앉아 색소폰을 분다. 그의 색소폰은 소설가 박상륭의 글과 닮았다고 할까. 일체의 악보 없는 즉흥은 청자를 무아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가만히 앉아 듣는 중에도 내 몸에 열이 나고 땀이 솟았다. 강태환의 음악은 외국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순환호흡기법의 독특한 스타일로 연주한다. 코로 숨을 쉬면서 입으로 색소폰을 불기 때문에 몇 십 분은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연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개 음을 동시에 낸다. 강태환의 재즈는 기존의 전위 연주가들과 달리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색채가 내재되어 있다. 전위 예술의 난해성 안에도 충실한 리얼리티와 격렬한 서정. 초월적 유희를 통해 청자에게 신들린 무당의 몸을 경험하게 한다. (Korean Free Jazz Live Improvisation/ 강태환)
뉴에이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재즈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즉흥 연주를 실행했지만 스윙감이 없다는 것에서 재즈와 구분할 수 있다. 긴장감이나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을 삼갔고, 단순하고 간결한 연주들이 보다 편안한 휴식을 준다. 음악적 소재들도 자연을 적극적인 소재로 삼고 있다. 음향의 크기에도 변화가 거의 없어서, 이런 음악들의 특징은 미니멀리즘 형식을 띠고 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그노시엔느」에서 미니멀리즘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비교적 잘 알려진 조지 윈스턴이나, 유키 구라모토 등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뉴 에이지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는 키스 자렛의 1970년대 즉흥 연주에서 도용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 키스 자렛의 즉흥 연주의 완성도에 비교해 볼 때 소수 뉴 에이지 음악가들의 음악은 한마디로 낯간지러운 연애시 같다고 할까. 가식적인 요소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층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얕은 냇물에 발목이 잠기는 정도의 깊이라고 할까. 뉴 에이지를 비하하자면 청자를 나약하게 만들어 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상상력도 주지 않고, 한 마디로 화장이 덧칠된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PolWechsel/ Polwechsel)
색소폰의 질감은 연주가들의 연주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유로재즈의 대표적인 색소폰주자 얀 가바렉의 색소폰은 차가움에 근저를 두고서, 바깥을 지향하는 연주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조 핸더슨의 색소폰은 다분히 내면에로 향해 있다. 일종의 치열한 자기 검정의 시를 쓰는 시인의 글처럼, 시종일관 자기에게로 과녁이 겨누어져 있다. 재즈 색소폰의 백미는 바로 이러한 내면적 관조의 치열함이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표현의 과잉으로만 음악은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조 핸더슨의 색소폰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연주 하지만 청자를 긴장시키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비 온 뒤의 들판의 흙냄새 같은 자신만의 텍스쳐를 직조한다. 쏟아지는 햇살에 잠자는 개를 깨워 구불구불 산책 가야겠다.( Inner Urge/ Joe Henderson)
단촐한 밥상 앞에 앉아 정갈한 모습으로 점심 밥 먹는 백발노인의 깨끗한 안면에서 풍겨지는 생의 완성 같은 피아노.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장 세바스티앙 시모노비에의 피아노를 대문 밖으로 내보낸다. 담 너머 붉은 벽돌의 정류장에서 가끔씩 휴식 취하는 우편배달부가 이 음악을 들었으면 싶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행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Vent & Marees/ Jena Sebastien Simonovie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