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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Aug 23. 2020

초월적인 검은색
outrenoir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변증법에 관해서, 여러 해전부터 검은색의 본질적으로 회화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념비적인 탐험이자 스스로 우트르누아르( outrenoir, 초월적인 검은색)라고 명명하는 것에 모든 작품 활동을 바친 화가 피에르 솔라주(pierre soulages)보다 더 나은 증언을 할 동시대인이 존재하겠는가?

    우리가 깊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은 솔라주가 이 검은색을 모든 회화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모방 또는 언어적 지시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1984년 이런 글을 남긴다.


일찍이 나는 이미지를 버린 화법을 구사한 바 있고, 나는 그것을 결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한다는 뜻에서) 하나의 언어로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이미지도 언어도 아닌 것이다.

 ouoir


       검은색을 바탕으로 하는 변증법에서, 이미지에 기입하지 않으며(그러니까 모든 빛을 완전히 결여하는 검은색은 무엇에 대한 모방이나 복사본이 될 수 있을까?) 언어에 기입하지도 않은 것(글쓰기의 바탕인 하얀색이 박탈된 검은색은 무언가에 대한 언어적 표명이나 분절적 기록이 될 수 있는가?)은 하나의 훌륭한 노선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솔라주 회화의 상징으로서 검은 색은 어떤 것인가? 어쩌면 햇빛의 순수함, 이폴리트가 지닌 마음의 순수함과는 반대로 모든 신이 제거된 성스러운 것의 징후가 아닐까? 솔라주는 3만 년 전 쇼베 동굴의 예술가들이나 1만 5000년 전 라스코 동굴의 예술가들이 동굴의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벽면 위에 검은색으로 빛나는 하나의 확신을 그렸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회화의 무채색으로서 검은 색에 관해서는, 빛과 반대되는 것이 안라 빛과는 다른 빛의 바탕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솔라주는 여러 차례 반복하여 '사물'로서의 작품(이미지도 언어도 아닌 이상 작품은 오직 그 자체만을 단언하는 사물이다.) 작품을 그려 내는 사람(화가),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관객)으로 이루어진 회화의 삼각형이 있음을 단언한 바 있다. 사물이란 부분적으로 맹목적인 예술가의 추구와 부분적으로 밝아진 관객의 추구 사이를 잇는 매개물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무분별과 밝아짐 사아의 관계, 그러니까 세 가지 항(두 주체와 하나의 사물)을 전제하는 관계는 결국 가능한 가장 훌륭한 '사물'이란 예술가가 어둠 속에 잠재하는 무한한 새로운 광채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솔라주의 우트르누아르는 분명 회화가 가진 역량에 대한 순수한 회화적 긍정이다.




     술라주의 거대한 검은색 다면화판들 앞에서 바라보는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이동, 즉 보행이 매 순간 빛을 초월적인 빛으로 바꾸는 것이며 색채를 검은색으로부터 굴절된 무색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때 회화의 삼각형은 바로 화가에 의해 분화된 검은색의 교차, 어둠 속에서 빛의 무한한 종합으로서 노출되는 사물, 이 무한성의 일부를 풀어내는 관객의 유동적인 시선이 된다.

    근본적으로 솔라주의 모든 그림에서 나타나는 고독하고도 밀도 높은 검은색은 그것이 계속될 수 있음을 나타내며, 그림의 제한과 광대함은 그저 완전히 무제한의 계기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검은색은 초월적인-검은색의 바탕인 것이다. 화가-주체와 관객-주체는 오로지 검은색만이 중언할 수 있는 미완성을 분유한다. 전자는 작품이 유래하는 활동이 확실히 끝났다고 말할 수 없고, 후자도 자신의 시선이 발결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글쓰기의 초월적인 검은색의 발명자라고 말할 수 있을 베게트의 산문에서처럼, 예술가의 윤리는 계속하라는 오직 단 하나의 명령만을 인정한다. 검은색 너머에서, 검은색 이상의 초월적인 검은색을 찾고, 이를 계속하라는 명령.






솔라주에게 회화의 엄숙한 단일성은 단 하나의 검은색에서 오는 굴절의 엄청난 규모에 의해 봉인되면서 단지 그 장이 될 뿐이며, 무한하게 복합적인 열린 관계의 그물망은 시선이 점차 드러래는 허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 관계들은 그것들을 억류하는 검은색의 단일성을 넘어서게 되는데, 왜냐하면 시선은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몸의 이동과 조합될 때 그 관계들이 오로지 무한할 뿐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관계들이 무한하다고 내가 말하는 이유는 이미지에 의해서도, 뒷이야기에 의해서도, 그것들에 부과된 어떤 의미에 의해서도, 심지어 단 하나의 해석에 의해서도 억류되거나 내포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검은색의 고요하고 기념비적인 단일성은 진실로 바다 저편과 같이 곙계 없는 세계를 나타내며, 관점과 무한한 잠재성을 나타내는 회화적 풍경이다.

솔라주 회화로부터 드러난 검은색의 완벽한 불완전성은 바로 그 완성된 본질이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검은색의 명령은 이런 것이다. "다른 어느것도 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여러분, 계속하시오!"


- 검은색 무색의 섬광들 - 알랭 바디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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