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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Aug 31. 2020

데리다

>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  '현존 presence'과 '부재 absence' 사이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차연은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부재다. 그것은 동일성도 차이도 아니다. 그것은 동일성과 그 동일성들 사이의 효과를 산출하는, 일종의 미분화未分化 differentiation를 시작할 수 있다. 


> 우리는 무언가 기원적인 것을 먼저 투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 나중에 인식되고 재현되고 가정되는 것이다. 기원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묘사하는 순간 이미 언어라는 그물망에 걸려든다.


> 우리가 불가능한 이상들 즉 민주주의, 정의, 자연, 문화적 기원, 순수한 이해, 완전히 조화로운 사회 등에 대한 이상들에 덜 현혹된다면, 새로운 형태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공식화(formulation)를 시작할 수 있다.


> 언어를 놀이를 '넘어선 무언가 a beyond'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말장난의 시작인데, 그 말장난 속에서 '세상'과 '묘사하는 언어'는 이미 기원과 이차적인 것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그려진다.


> 우리는 언제나 언어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물자체에 닿기 위해 언어의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심지어 비가 얼굴에 닿을 때조차, 연상들이나 미분화들과 함께 한다. 비는 가뭄의 종식이거나, 내 옷에 닥친 궂은일이거나, 감각의 즐거움이거나, 다시 타오르는 멋진 기억이다. 비는 이미 나를 위한 어떤 의미로 물들지 않은 상태로는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해석은 언어와 의미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비'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오해 역시 여전히 해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어 접근할 수 없다고 믿는 '기원적' 세계를 투사하고 있다.


> '대리 보충'이라는 용어는 '결정 불가능한 ' 것이다. 충만과 결여 사이의 결정 불가능성의 가장 일상적인 사례는 '백과사전의 부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록은 충만함이라는 내포를 갖고 있다. 부록의 목적은 어떤 결핍을 보충함으로써 백과사전을 완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중에 부록은 또한 백과사전을 결여되어 있던 것으로 재형성한다. 왜냐하면 부록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전은 완성된 것이라는 지위를 여전히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록은 '충만'과 '결여'라는 두 가지 함축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결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불충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충만도 결여도 아니며 둘 다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 이를테면 강도는 한 떼의 강도들에게 문을 열어주려고 이미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염 혹은 타락이라는 것은 이미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안정된 기원이 아니라 원천이 없는 '반사하는 웅덩이들과 이미지들'이 있을 뿐이다. 차이 자체가 기원인 것이다. 왜냐하면 반사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 안에서 분열된 것이기 때문이다.


>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두 일종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다.


> 인간이라는 숭배자 없이 신이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세속적인 복제물들의 기원으로서 아니면, 플라톤의 이념들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죄와 타락으로 간주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면, 성경에서 상술하고 있는 인간의 기원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  외부는 내부의 심장에 있으며, 외부의 의미는 언제나 내부에 현존한다.


> 글은 존재 내부에 있는 타자의 놀이이다.


> 진정으로 적절한 애도는 우리가 완수할 수 없는 애도이다. 만일 애도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실패하는 것이고, 애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 하나의 선물이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선물이라는 사건은 오로지 그 자신의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산출된다.


> 용서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용서라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 용서가 너무 쉽게 주어진다면, 어떤 진정한 용서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불가능한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용서라는 점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 가능한 최선의 환대는 이상적인 환대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러한 입장을 통해서만, 용감하게 그리고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공허와 맞싸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이 부재하는 가운데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환대를 시도해야 한다.


> 법이 해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나쁜 소식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러한 충격 속에서 정치학을 위한 희망, 모든 역사적 진보를 위한 희망을 볼 수도 있다.


> 법의 해체 가능성은 정치학을 위한 '행운의 일격'일 것이다. 이러한 분석들은 종종 기능적이다. 비평가들은 어떤 법률 또는 법체계들이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면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다양한 것들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돌린다.


> 정의 또한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용어로 정의된다. 정의는 법에 깃들어 있는 일종의 과잉 또는 타자성이다. 


> 결정 불가능한 것이라는 호된 시련을 거치지 않은 결정은 결코 자유로운 결정이 아닐 것이며, 오로지 프로그램화될 수 있는 적용이거나 계산 가능한 과정의 전개에 불과하다. 그것은 합법적일 수 있으나, 정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 민주주의는 결코 현재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며, 민주주의는 그 불가능한 것의 약속을 기입해놓고 있다. 그리고 이 존재하는 불가능성은 여전히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 불가능성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곤란을 야기하고, 동요하게 하고, 우리가 달성한 일종의 불충분한 환대, 선물, 용서에 대한 내적인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


> 아마도 최선의 것은 '차이를 존중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그의 체험이 근본적으로 나에게는 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


> 민주주의는 여전히 도래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무한히 완벽해질 수 있는, 그리하여 언제나 불충분한 미래일 뿐만 아니라, 약속의 시간에 속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미래의 순간에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다.


> 완전성의 본질은 끊임없이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를 상징하는 완전성을 끊임없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사건, 변화, 놀라움, 진보의 형태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민주주의라는 관념은 언제나 지연되고 있으며 그 자신으로부터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불가능성이라는 유령이 깃들어 있다. 불가능성은 우리와 중요한 그러나 환영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순수한 민주주의라는 불가능성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도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마치 우리가 우주의 최종적 도래를 조정할 만큼 우주의 주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이 결코 도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만큼 주인인 것은 아니다.


>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건들과 결정들을 위한 하나의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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