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는 정지 속의 변증법이다.
* 정신의 깨어 있음은 위험의 순간에 자신을 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을 뜻한다.
*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테 하우스 방문, 꿈속에서 방들을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학교에서처럼 회칠한 복도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나이 든 영국 여자 방문객 두 명과 한 명의 큐레이터가 그 꿈에 등장한 엑스트라 들이었다. 큐레이터는 우리들에게 복도 맨 끝 창가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방명록에 기입할 것을 권했다. 가서 방명록을 남기자 이미 거기에 내 이름이 어린아이의 서툰 글시로 크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 꿈속에서 나는 괴테의 서재에 있었다. 그 방은 바이마르에 있는 방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창문과 마주한 벽에 책상의 측면이 맞붙어 있었다. 책상에는 최고령의 시인이 앉아서 집필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작업을 중단하고 고대의 골동품인 자그마한 꽃병 하나를 내게 선물로 주었을 때 나는 옆자리로 비켜났다. 나는 그 꽃병을 손에 들고 돌려보았다. 엄청난 열기가 방에 가득했다. 괴테는 일어나서 나와 함께 옆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내 친척들을 위해 긴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식탁은 친척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조상들의 자리까지도 생각한 식탁이었을 것이다. 나는 괴테의 옆자리인 오른쪽 맨 끝에 앉았다. 식사가 끝나고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부축했다. 그의 팔꿈치에 내 몸이 닿자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 기다란 길이 시작하는 곳에 성문이 하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의 집이 나오는데 나는 매일 저녁 그곳을 찾아갔다. 그녀가 이사를 가자 그때부터 내게 그 아치형 성문의 입구는 마치 청각을 잃어버린 귀처럼 보였다.
* 이별하며 떠나는 자는 얼마나 쉽게 사랑을 받는지! 사라져 가는 사람을 비추는 불꽃은 그만큼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 불꽃은 배에서 또는 차창에서 언뜻 실려 오는 한줄기 바람에 힘을 얻는 법이다. 멀어져 가는 거리(距離)는 사라져 가는 사람에게 물감처럼 스며들어 그에게 은근한 열기를 불어넣는다.
* 아주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와 그토록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멀리 가고 나서야 비로소 정체가 드러나는 그 무엇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 나는 여자 친구를 방문하러 리가에 갔었다. 그녀의 집, 도시, 언어가 내게 모두 생소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홀로 두 시간 동안 거리를 걸었다. 나는 거리들을 그런 모습으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집집마다 현관문에서 화염이 솟구쳐 나왔고, 귓돌마다 불꽃이 튀어나왔으며, 전차는 소방차처럼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 여자 친구가 집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아 전차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와 그녀, 우리 둘 가운데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먼저 상대를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 시선의 도화선을 내게 놓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탄약 창고처럼 폭발해버렸을 테니까.
* 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훤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놓은 것 같았다.
* 해골은 검은 눈구멍의 완전한 무(無)표현성과 비웃음 치는 이빨들의 야생적 표현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 높이 평가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한 친구가 새로 나온 자신의 책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 책을 열어보면서 스스로 넥타이를 고쳐 매는 나 자신을 보고 놀랐다.
* 행복하다는 것은 경악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음을 뜻한다.
*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지어 집중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거의 모든 책에서 그 사람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은 심지어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적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편소설에서든 장편소설에서든 노벨레에서든 그 사람은 항상 새롭게 변신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추론된다.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 한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지내고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몇 주 또는 몇 개월이 지난 뒤 그 여자와 떨어져 지내다 보면 그 당시 얘기했던 것이 다시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그 모티프는 진부하고 야하고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야기를 나눌 때 사랑으로 그 위에 몸을 숙여주었던 그 여자만이 그것을 우리 앞에 그늘지게 하고 보호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치 부조처럼 모든 주름들과 구석들 속에 그 생각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우리가 혼자 있으면 그때 이야기했던 내용은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 위안도 그늘도 없이 우리의 인식의 빛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시작하면 그 풍경은, 마치 우리가 어떤 집을 들어설 때 집의 전면이 사라지듯 일순간 증발해버린다. 그 풍경은 아직 우리가 습관적으로 늘 하듯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로 인해 과도하게 무거워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가 그곳에서 한 번 방향을 분간하게 되면 그 최초의 이미지는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된다.
* 무대 배경에 그려진 먼 풍경에서 멂은 어떤 가까움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또한 가까이 다가가도 사라지지 않는 푸른빛의 멂이다. 그 멂은 우리가 가까이 가면 널찍하고 장대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더 닫히는 듯이, 더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바로 무대그림들은 사람들에게 형언하기 힘든 감명을 준다.
* 나는 시내 어디에선가 버스를 기다리면서 10여 분간 서 있었다. "앙트랑... 파리 스와르... 라 리베르테"라고 하면서 신문을 파는 여자가 내 뒤에서 끊임없이 단조로운 어조로 외쳐댔다. "앙트 라... 파리 스와르... 라 리베르테" - 그것은 삼각형의 평면도로 된 어떤 교도소 감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서리들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그려보았다.
* 꿈에서 나는 '평판이 나쁜 집' 한 채를 보았다. " 그 집은 버릇없는 동물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어떤 호텔이었다. 거의 모든 투숙객이 그 버릇없는 동물수(水)만 마시고 있었다. " 이런 말들 속에서 꿈을 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불을 훤하게 켜놓은 방에서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고,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 영세민 아파트 단지에, 그 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슬피 늘어지는 음악이 있다. 그것은 가구가 비치된 방들을 위한 곡으로서, 그 방에서 사람들은 일요일이면, 마치 시든 이파리들로 장식 된 한 접시의 농익은 과일들처럼, 그 구슬픈 노랫가락으로 장식된 상념들에 젖어 앉아 있다.
* 고대의 조각상들이 바라보는 이에게 미소를 띠며 자신들의 신체에 대한 의식(意識)을 내보이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가 갓 꺾어온 꽃들을 묶지 않고 흐트러진 채로 우리에게 내미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이후의 예술들은 마치 억센 풀줄기로 계속 꽃다발을 묶어두는 어른처럼 얼굴 표정들을 엄하게 졸라매고 있다.
* 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 나는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 앞의 두 번째 벤치에 두 명의 소녀가 자리를 잡았다. 서로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던지 그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큰소리로 이야기해도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이탈리아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들이 작게 웅얼거리는 이 이유 없는 속삭임을 앞에 두고, 나는 통증이 있는 자리에 서늘한 붕대가 놓인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 전날 베개 밑에 깔고 잔 책의 내용을 아침에 일어나 훤히 다 외우고 있는 학생, 잠결에도 하인들에게 할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인, 이렇게 휴식이 창조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모든 대가(大家) 다움의 알파와 오메가이자 그것의 특성이다. 대가(大家)가 기진맥진해서 지칠 때까지 열성과 노력을 다 하게 되면 마침내 몸과 각각의 사지는 그것들 자신의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사람들은 연습이라 칭한다. 의지가 몸의 내부에서 신체기관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물러나게 되면 성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잃어버린 물건을 어디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다른 것을 찾다가 그것이 그의 손으로 굴러들어 오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손이 그 일을 떠맡았던 것이고, 일순간 손은 그 일과 하나가 된 것이다.
* 사람들이 구전하는 슐러(Schuler)의 말이 있다. 그는 고대의 양탄자나 장식용 직물이 규칙적인 문양 가운데 어디에선가 약간의 일탈을 드러내는 것처럼, 모든 인식에는 미량이나마 부조리함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인식에서 인식으로 진행하는 일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식 자체 내에서 비약이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이 비약이 바로 인식을 천편일률적으로 제조되는 모든 상품계열로부터 구별시켜주는 진정한 표지이다.
* 아이가 아프다. 어머니는 아이를 침대에 데려가 눕히고 그 곁에 앉는다. 그러고 나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나는 N이 자기 아내의 손이 지녔다는 특이 치유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의 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손동작은 참으로 많은 표현을 함축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그 동작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동작들은 마치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들려주기)를 통해 병을 치유한다는 것을 우리는 메르제부르크의 마법의 단창구(短唱句)의 예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 단창구들은 오딘의 주문들을 되폴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가(詩歌)는 오딘이 주문들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사정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환자가 진료 초기에 의사에게 들려주는 얘기가 치료과정의 시작이 될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하여 이야기라는 것이 많은 치유의 참다운 분위기와 최적 조건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그렇다. 모름지기 병이란 이야기 들려주기(서사)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멀리 떠내려 보내질 수 있다면 치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생겨남직하다.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댐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댐은 이야기 흐름의 낙차가 충분히 클 경우, 그러니까 그 흐름이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지극히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쓸어가 버릴 정도로 클 경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침대 맡에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이 흐름의 하상(河床)을 그리는 작업인 셈이다.
* 매일 아침 우리는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일들을 전해 듣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기한 얘기들은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설명들이 첨부되지 않은 사건은 하나도 전해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거의 모든 것이 정보에 도움이 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재현할 때 그 이야기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그로써 이야기하기의 기술을 반쯤은 이미 이룬 거나 다름없다.
이 점에서 고대인들은 달인(달인)들이었다. 헤로도토스가 그중 정상에 있다. 그의 저서 <역사>의 제3권 14장에는 사메니투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집트 왕 사메니투스가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붙잡혔을 때 캄비세스는 포로로 잡힌 그 왕을 능욕하려고 별렀다. 왕은 사메니투스를 페르시아 개선행렬이 지나갈 거리에 세워두도록 명했다. 그리고서 왕은 사메니투스가 자신의 딸이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가는 모습을 보게 시켰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탄식하고 절망하는데,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땅에 고정시킨 채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아들이 처형되기 위해 개선행렬 속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 사메니투스는 그의 하인들 가운데 하나인 늙고 초췌한 남자를 포로들의 행렬 속에서 알아보자 주먹으로 머리를 치고 온갖 방식으로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 - 이 야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보의 가치는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정보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 정보는 전적으로 그 순간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되며,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에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는 그와는 다르다. 이야기는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내부에 자신을 그러모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펼쳐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몽테뉴는 그 이집트 왕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와 이렇게 물었다. 왜 그는 하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 탄식했고 그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을까? 몽테뉴는 이렇게 답했다. "왕은 슬픔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미량의 증가만 있었어도 슬픔의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렇게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다르게 설명될 수도 있다. 몽테뉴가 던진 질문을 주변 친구들에게 한번 던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여러 가지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주변 사람들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왕에게 왕가의 운명은 감정을 북돋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운명과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삶 속에서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는 많은 일이 무대 위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하인은 왕에게 그런 배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커다란 슬픔은 쌓였다가 긴장이 풀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법이다. 하인을 본 순간이 바로 그렇게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네 번째 사람이 말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일어났다면 모든 신문에 사메니투스가 자기 자식들보다 하인을 더 좋아했다고 쓰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각 리포터가 그 이야기를 즉석에서 설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헤로도토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는 가장 건조한 보고다. 그렇기 때문에 옛 이집트에서 전해오는 이 이야기는 수쳔 년이 지난 뒤에도 경탄과 숙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수천 년 동안 공기에 노출되지 않고 피라미드의 방 속에 밀폐되어 있다가 오늘날까지 발아력을 보존해온 곡식 알갱이들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