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 우리는 행위한다고 생각하고,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은 타자 혹은 타자들이다.
> 예술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비개인성에 대한 인간의 복수다.
> 19세기는 작문 예술을 개발했으나, 이 예술에 음악성을 부가한 것은 20세기다.
> 선악의 파악 불능은 바로 종교의 창설자들이 겪은 고뇌가 아니었을까?
> 유머는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발견케 하는, 그리고 타인들에 대한 인간의 그 뿌리 깊은 판단불능을 발견케 하는 신성한 빛이다.
> 교미 뒤엔 모든 동물이 슬프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 산초의 부러진 일백 세 개의 이, 우리는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가 없다.
> 바흐의 푸가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초주관적 아름다움을 관조케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 상태를, 우리의 정열과 슬픔을, 우리 자신을 망각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낭만적 멜로디는 그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무시무시한 강도로 우리의 자아를 느끼게 하고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을 망각시키고자 한다.
> 인간은 영원을 갈구하지만 영원의 대용품, 즉 엑스터시의 순간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 행복은 결국 유머의 특징을 갖는 셈이다.
> 어떤 현상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실재이건 잠재이건 그것의 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어떤 유혈의 의식이 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추문이다. 하지만 이 추문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 추문의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우리는 인간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 감정적인 사람들보다 둔감한 사람은 없다.
> 거기서, 몇 시간이 흘렀다. 서로의 가쁜 숨결로, 서로의 심장의 펄떡임으로 흐른 몇 시간 동안 K는 어느 낯선 세계, 공기조차도 고향의 공기의 어떤 요소도 갖지 않은, 낯설음으로 질식할 듯한 곳, 미친 유혹들 속에서, 그저 계속 갈 뿐, 그저 계속 방황할 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낯선 세계 속에서 자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혹은 자신이 이전의 누구보다도 멀리 있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가졌다. - 카프카, 성 -
> 그녀는 뭔가를 찾고 있었고 그도 뭔가를 찾고 있었다. 성난 듯, 상을 찌푸리면서, 머리를 타인의 가슴에 파묻은 채 그들은 찾고 있었고, 그들의 포옹과 그들의 꼿꼿한 육신은 그들로 하여금 찾아야 할 의무를 망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기시켜 주었고, 마치 절망한 개들이 땅을 파헤치듯 그들은 서로의 육체를 파헤치고 있었고, 어찌해 볼 수 없으리 만치 살벌했으나, 다시 한번 최후의 행복을 거머쥐기 위해, 이따금씩 그들은 혀로 서로의 얼굴 위를 넓게 지나가곤 했다. -카프카, 성
> 카프카의 산문이 날아올라 노랫가락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의 산문은 다음의 두 날개로 날아오른다. 은유적 상상력의 그 강도와 마음을 사로잡는 멜로디,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낱말들의 반복과 관계된다.
> 매혹적인 멜로디들은 전적으로 반복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들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구어에서, 날것 그대로의 언어에서 오는 것들이다.
> 사회적 욕구는 현재 순간 위로, 실재의 얼굴이 사라지게끔 통념의 베일을 친다. 네가 체험한 것을 네가 영원히 알지 못하도록
> 소설을 열등한 장르로 만드는 것은 바로 시적 특성의 결여이다. (앙드레 브르통)
> 베토벤에게는 놀라울 만치 약한 이행부들이 많다. 하지만 강한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약한 이행부들이다. 이는 마치 잔디밭과 같은데,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 인생의 산문보다 더 감춰진 것은 없다. 소설이 하나의 예술인 것은, 이 산문의 발견이 그것 아닌 다른 어떤 예술도 온전히 담당할 수 없는 그것의 존재론적 사명인 까닭이다.
>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오직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유럽 철학이 인간의 삶을, 인생의 '구체적 형이상학'을 사유할 줄 몰랐다면, 이 공백 지대를 담당할 운명은 바로 소설에서 예정된 것이며, 이 점에서 소설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 소설가는 어떤 확실한 대답을 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끝없이 질문하는 사람이고, 더듬거리며 인간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조금씩 탐색해 가는 사람일 뿐이다.
>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
> 오직 소설만이, 인간이 아는 가장 큰 신비 가운데 하나인 이 신비를 구체적으로 탐색할 수 있으며, 처음으로 이 일을 한 사람은 아마 톨스토이일 것이다.
> 톨스토이의 등장인물들의 변신은 오랜 진화로서가 아니라 돌연한 계시로 나타난다. 배주호프는 무신론자에서 놀라울 만큼 쉽게 신자로 변한다. 죽음과의 단순한 대면과 하늘을 향한 오랜 응시 덕분에, 톨스토이의 등장인물들이 맞는 그 결정적인 순간들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세부 사실들이다.
>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세계가 바뀔 때이다.
> 그들이 변하는 것은 그들 자아의 어떤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과 융화되기 위해서이다. 그 변화는 그들을 변함없이 남을 수 있게 해 준다.
> 얼마 동안 인간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자살하기로 한 안나 카레리나의 결심을 촉발시키는 것은 마주친 얼굴들의 누추함, 기차 객실에서 우연히 들은 말들, 뜻밖의 추억 등 여러 세부 사실들의 공모이다.
> 안나가 그렇게 죽은 것은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 - 아름다움의 법칙-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에게서, 인간은 스스로를 변모시키는 힘, 환상, 지성을 가짐으로써 더욱더 그 자신이 되고, 더욱더 개별적으로 된다.
> [소송]에서의 카프카보다 더 멀리 갈 수는 없다. 그는 지극히 반시적(反詩的)인 세계의 지극히 시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
> '카프카적인 것'이란,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인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거의 영원히 인간을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 출구 없는 상황 안에서도 돌연히, 잠깐 동안 열리는 창문들이 있다. 거의 모든 창문마다 사람들이 있었다. 셔츠 바람의 사내들이 거기서 팔꿈치를 괴고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고 다정스레, 어린아이들을 창문 난간에 기대게 하여 붙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맨발의 사내 하나가 상자 위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두 소년이 손수레 양쪽 끝에서 시소를 하고 있었다. 펌프 앞에는 캐미솔 차림의 연약한 어린 소녀가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는 사이 K를 지켜보고 있었다.
> 카프카의 소설에서 열린 창들은 톨스토이의 경치로 통한다.
>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
>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한 편의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다. (헤르만 브로흐)
> 이제껏 알려져 있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삶이 무엇이냐를 탐구하는 것이다.
> 소설은 프로이트 이전에 이미 무의식을 알고 있었고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계급투쟁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현상학자들 이전에 벌서 현상학을 실천했습니다. 그 어떤 현상학자도 알지 못했던 '현상학적 기술'들이 프루스트에게는 얼마나 멋지게 나옵니까!
> 성숙성의 기준은 상징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인류는 점점 더 어려지고 있다.
> 소설이라는 몽뚱아리로 들어오게 되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됩니다. 소설의 바깥에서는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이건 다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 안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 주제라는 것은 실존적 물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점점 더 그러한 물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특정한 단어들, 주체-단어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 저는 항상 위대한 뜻밖의 배반을 꿈꿉니다.
>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오래 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 (얀 스카첼)
> 카프카에게 있어서 논리는 뒤집어진다. 벌을 받는 자가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벌의 부조리함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법을 받는 사람은 평온을 찾기 위해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하시키고자 한다. '벌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 '카프카적인 것' 이란 차라리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인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간을 거의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 '카프카적인 것'은 내면의 영역만으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고 공적인 영역만으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둘을 모두 포옹하는 것이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거울이고,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반영한다.
> 카프카는 예언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봄[見]이 '미리 봄'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사회체제의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 시인이 "저 뒤쪽 어디에" 숨겨져 있는 "시"를 찾아내려 하는 대신에 이미 알려져 있는 어떤 진실에 봉사하기 위해 "참여"한다면, 그는 시의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상정된 진실이라는 것이 혁명이라 불리건 항의라 불리건, 종교적 신앙이라 불리건 무신론이라 불리건, 그리고 그것이 보다 더 정의롭건 그렇지 않건, 이런 것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발견'하는 진실 이외의 다른 진실에 복무하는 시인은 가짜 시인인 것이다.
> 카프카의 소설들은 바로 소설의 (소설이라는 시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커다란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는 더듬거려 가며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밝혀보려고 애쓰는 발견자이다.
>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이다. 예술에 있어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말하는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