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흥미 있는 것은 삶이 내포하는 공백들, 균열들,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그렇지도 못한 공백들이다.
* 나는 정신분열증이라면 진짜건 가짜건 진저리가 나는 참이라서, 즐거이 편집증으로 개종하겠네.
*그 시대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나의 방법은 무엇보다도 철학사를 일종의 비역(獸姦)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무염수태 같은 것이었지.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그것은 그의 아이가 될 것이고, 흉물스러울 것이었지.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해. 실제로 그 작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가 괴물 같다는 사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지. 온갖 종류의 비틀기 미끄러지기 부수기 그리고 은밀하고 기분 좋은 배설을 거쳐야 했으니까.
*나는 니체를 읽었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있었지 왜냐하면 니체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등에 붙어 아이를 만드는 일, 그건 바로 그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이야. 그는 우리에게 변태적 취향을 심어주지(그건 맑스도 프로이트도 결코 못했던 것이지).
* 글쓰기란 하나의 유출과 같고, 그 유출은 여러 형태의 유출 들 중 하나일 뿐, 별다른 특권을 갖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다른 유출들, 즉 똥의 유출, 말의 유출, 행위의 유출, 관능의 유출, 금전의 유출, 정치의 유출 등과 함께 흐르든가 혹은 역류하든가 하는 뒤섞임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지. 블룸처럼 한 손으로 수음하며 다른 한 손으로 모래 위에 글을 쓸 때, 두 유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 강렬함 속에 이루어지는 독서 방식, 외부와 관계를 갖고 또 흐름을 흐름으로 받으며, 책과는 관계없이 개개의 사건들, 실험들, 장치들을 다루는 장치, 무엇이든 상관없이 다른 것들과 함께 움직이는 기능 등등...., 그것은 사랑의 방식이네.
* 비루한 인간이란 악으로의 넘침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원적으로 일상적 인간, 이웃의 고소라든가 경찰의 소환, 소송..... 등 잡다한 사건에 의해 갑작스레 훤히 드러나는 여느 인간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과 마주친 인간, 말하고 보여지도록 독촉받은 인간입니다. 체홉(Tchekhov)이나 카프카(Kaflca)에 더 가까운 것이지요. 체홉 작품에는, 여러 날 동안 잠을 재울 수가 없어서 아기를 목졸라 버린 어린 하녀라든가, 낚싯대에 무게를 주기 위해 철도의 볼트를 뽑아낸 어느 농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루한 인간이란 현존재(Dasein)입니다. 비루한 인간이란 바로 빛다발과 음의 파동 속에 잡힌 입자입니다.
* 그것은 외부(Dehors)의 선입니다. 외부는, 푸코에 있어서나 그 말을 먼저 사용한 블랑쇼에 있어서나, 모든 바깥 세계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내면세계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이 끝없이 뒤바뀌는 것이지요. 사유는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외계의 사건을 펼치는 것도 아니지요. 사유는 바로 그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또 그리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유는 그것과 대면함으로써 성립됩니다.
* 그는 그것을 고전작가들처럼 하나의 점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치고 그것이 끝날 때까지 양쪽으로 넘나들어야 하는 하나의 선으로 취급했습니다. 외보의 선과의 대결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에이합 선장처럼 고래를 쫓다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을 넘어갑니다.
* 창조란 불가능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그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프카가 설명하듯이, 유태인 작가가 독어를 할 수 없다든가, 체코어를 할 수 없다든가, 또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든가 하는 그런 불가능성 말이다. 피에르 페로는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음, 영어를 할 수 없음, 불어를 할 수 없음 등을 덧붙인다.
창조는 장애 요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불어와 같이 주어진 언어 있어서도, 새로운 통사법은 그 언어 속에 있는 이방 언어이다. 만일 창조자가 전반적 불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는 창조자가 아니다. 창조자는 스스로 자기 특유의 불가능성을 창조해 내는 자이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가능한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매캔로처럼 자기, 자기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뭔가 찾아내는 되는 것이다. 벽을 더듬어야 한다. 전반적 불가능이 없다면, 탈주로도 없을 것이며, 창조를 성립시키는 출구, 진실을 구성하는 허위의 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액체. 기체적인 것들을 써내야 한다. 일상적인 지각과 생각이란 견고하고 기하학적인 것이기 대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 철학에서 베르그송이 한 일이고, 소설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제임스가 한 일이며, 영화에서 르노아르가 한 일이다.
지구를 벗어나라는 얘기가 아니다. 지구를 좌우하는 액체와 기체를 창출함으로써 더욱 지상적이 되라는 얘기이다. 제자리에서 선풍을 일으키기 위해서 스타일은 많은 침묵과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이어 아아들이 쫓아가는 도랑물 위의 성냥개비처럼 흘러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들을 짜맞추고 문장을 조립하고 관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스타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단어들을 열어야 하고, 사물을 쪼개야 한다. 그래야 지구의 질병을 전파하는 매개물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작가, 창조자란 하나의 그림자이다. 어떻게 프루스트나 카프카의 전기를 만들 수가 있는가?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육체보다는 그림자가 우선적이 된다. 진실을 실존의 산출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작가는 실제적 물체들을 내보낸다. 페소아의 경우, 그 물체들이란 상상의 인물들이다. 상상적이긴 하지만 그 인물들은 글쓰기에 의해 기능이 주어짐으로써 실제적인 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인물들이 행하는 것을 결코 하지 않는다. 문학에서는, "많이 보고 많이 여행하였다."는 식으로 먼저 경험을 하고 그다음 이야기를 하는 체제로는 멀리 나아갈 수가 없다.
* 위대한 철학자들은 위대한 문체를 가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철학에 있어서 문체란 개념의 움직임입니다. 물론 움직임이란 문장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장은 개념의 움직임에 생명을, 독자적인 생명을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문체란 언어(Langue)를 변주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변조, 외부를 향한 하나의 언어적 긴장을 뜻합니다. 철학에서도 하나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자문해봐야 합니다. 단지 인물들 대신 개념들이 있고, 환경. 정경들 대신에 시간. 공간들이 있지요. 글을 쓰는 것은 항상 생명을 주기 위해서, 삶이 갇혀 있는 곳에서 삶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탈주선들을 그려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이유로, 언어가 균질한 체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균형적이고 늘 이질적 이어야 합니다. 문체는 언어 속에다 전위치(電位値)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섬광 같은 분출이 언어 밖으로 솟아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말 주변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것들, 존재하리라고 미쳐 짐작도 못했던 실체들을, 보고 생각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문체에 반대되는 것이 두 가지 있지요. 균질한 언어가 우선 그렇고, 그와 반대로 이질성이 너무도 커서 무심한 것, 무상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두 극점 사이에 아무런 구체적인 것도 발생되지 않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된 것(혹은 주절)과 부수적인 것(혹은 종속절) 사이에 하나의 긴장, 전광형(電光刑)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곧아 보이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럴수록 특히, 그래야 합니다. 문체란 단어들이 하나의 섬광을 발생시킬 때, 단어에서 단어 사이를 오가며 때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단어들을 서로 비추는 섬광을 일으킬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 위대한 작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숭고한 병자들이거나, 그들에게서 작품 속의 비밀, 작품의 암호가 될 만한 신경들 혹은 정신병의 징후를 찾으려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환자들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의사들, 꽤나 특수한 의사들이지요. 왜 마조흐가 세상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변태 성향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을까요? 그 자신이 그 때문에 고통받아서가 아니라, 그것의 징후들을 새롭게 하고 독창적인 일람표를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약을 주된 기호로 삼고서, 마조흐적 행위를 집단적 소수의 상황 및 그 소수 집단 속의 여성적 역할과 결부시켰지요. 그래서 매저키즘은 소수의 기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저항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마조흐는 위대한 징후학자입니다. 프루스트의 경우도, 그가 탐구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호들입니다. 그는 기호들의 환경적 본성과 송출 방식, 질료, 체제 등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반 기호학, 세계의 징후학에 관한 책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은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악마적 세력들을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바 있지요. 예술가 혹은 철학자는 문명의 의사라고 말입니다. 때로 그들이 정신분석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정신분석학에는 비밀의 축소성향, 기호와 징후들의 몰이해 성향이 있으니까요. 로렌스가 "더러운 작은 비밀"이라고 명명한 것을 향하여 모든 것을 몰아가는 성향이 있지요.
이러한 것은 단순히 진단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기호들은 삶의 방식들, 생존의 가능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분출하는 삶 혹은 고갈된 삶의 징후들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소진된 삶, 개인적인 삶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자아, 자신의 기억과 질환 등을 가지고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글쓰는 행위, 삶을 가두고 있는 것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예술가 혹은 철학자는 건강이 나쁘고, 신체적으로 연약하고, 정신의 평정이 취약한 수가 많습니다. 스피노자가 그랬고 니체, 로렌스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꺾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보고 느끼고 사유한 삶으로 인해 으스러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커다란 삶...."기호가 가까워지는 "은 바로 그들을 통해서입니다. "짜라투스트라" 마지막 부분, 그리고 "윤리" 5편에 나타나 있듯이 말입니다. 글은 아직 언어를 갖추지 못한 미래의 대중을 위해 씌어지는 것입니다. 창조한다는 것은 전달이 아니라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기호들과 사건, 삶, 활력론(活力論)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비조직적 삶의 힘, 그림. 글쓰기. 음악 등의 선(線) 속에 담겨 있는 힘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는 것은 조직체이지 삶이 아닙니다. 삶에게 출구를 가리켜주지 않는 작품, 포장된 도로 사이로 길을 그려 보여주지 않는 작품이란 없습니다. 내가 쓴 모든 글은 적어도 내가 바라기로는 활력론적인 것이었고, 기호들과 사건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이나 다른 제반 예술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 방식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문학을 위하여 내가 바랐던 책을 만들 기회가 없었지요.
* 나는 사물들을 풀어내고(demeler) 잘라내야(recouper) 할 선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점(點)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점을 찍는다는 것은 왠지 어리석어 보입니다. 선이 두 개의 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여러 선의 교차점에 있는 것입니다. 선은 결코 일정한 것이 아닙니다. 또 점은 단지 선의 굴절일 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시작도 끝도 아니고 중간일 뿐입니다. 사물과 사유는 중간에서 뻗어나고 커갑니다. 자리를 잡아야 할 곳도, 굴곡이 이루어지는 곳도 중간에 있는 공간(milieu)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선적(多線的) 총체는 철학, 철학사, 역사, 제반 과학, 제반 예술들을 서로 통하게 하는 재단. 교차. 굴절 등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회오리바람처럼 공간을 점하는 어떤 운동, 비특정적인 한 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운동의 굴곡과도 같은 것입니다.
* 스타일은 하나의 배치, 즉 발화 행위의 배치입니다. 스타일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더듬거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말을 더듬을 필연성이 꼭 있어야 하니까요. 자신의 구체적인 말인 파롤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언어활동 자체를 더듬거리기, 모국어를 쓰면서 이방인으로 있기.
*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 속에서도 2개의 언어 사용가가 되어야 하며, 우리 언어의 내부에서 마이너 언어를 가져야 하고, 우리의 모국어를 마이너 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 자기 나라 말을 쓰면서 이방인처럼 말하는 것.
*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문학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 위대한 문학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오역이 아름다움으로 귀결된다."
* 문제는 <마이너리티-되기>입니다. 즉 문제는 어린이. 미치광이. 여자. 동물. 말더듬이. 이방인인 척하거나, 흉내 내거나, 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 신경증 환자의 반대, 즉 병약한 건강 상태로 위대한 삶을 산 낙천가인 니체는 이렇게 썼습니다. "때로 예술가, 특히 철학자는 자신의 시대에 오직 우연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나타날 때, 이제껏 한번도 도약하지 않는 자연은 단 한번의 유일한 도약을 하는데, 이것은 기쁨의 도약이다. 이 목적지에서 자연은 이제껏 너무 큰 판돈을 걸고 삶과 생성의 게임을 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으로 인해 자연은 빛나고, 사람들이 매력이라고 부르는 밤의 부드러운 권태가 그 얼굴에 깃든다."
* 작업을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됩니다. 오직 어둡고 은밀한 작업만이 있습니다. 우연한 마주침들로 번성하는 고독.
* 우리 자신을 위해 말한다고 여길 때조차, 우리는 언제나 말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말을 합니다.
* 언어란 항상 얼굴의 특징들, '얼굴성visageite'의 특징들에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 언어란 생각되어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복종되어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 어떻게 사유는 사유의 모델을 뒤흔들 수 있을까, 어떻게 사유는 사유의 풀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국부적인 곳에서조차, 가장자리에서 조차, 지각 불가능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길에서 중요한 것, 선(線)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 혹은 한복판입니다.
* 생성에는 과거도 미래도 심지어 현재도 없습니다. 생성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생성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소용돌이 꼴로 둘둘 말리는(involuer)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퇴보하는 것도 진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성이란 점점 더 절제하는 것, 점점 더 단순해지는 것, 점점 더 사막이 되어가는 것, 그리하여 군(群)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 글쓰기란 무엇인가의 시작도 끝도 아닌 이러한 단순성, 이러한 절제에 이르는 것입니다.
* 유목민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생성, 여성-되기, 동물-되기, 말-되기만이 있을 뿐이죠. 그들의 비상한 동물적 기술을 생각해 보세요.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습니다. 오직 지리학만이 있을 뿐이죠.
* 글쓰기는 속도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 니체가 독일어로 했던 일은 바로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느리게 작업한 글쓰기 속에서 비로소 이 절대적인 속도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는 효과가 아니라 산물입니다.
* 음악이 점이 아닌 선만을 이는 것은 우연일까요? 음악에서는 점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음악은 오직 과거도 미래도 없는 생성들일 뿐입니다. 음악은 반(反) 기억입니다.
* 우리는 이원론을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이 언어 안에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원론 없이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어에 맞서 싸우야 하고, 말 더듬거림을 고안해야 합니다.
* 떠나기, 도주하기란 선 하나를 그리는 것입니다. 로렌스에 따르면, 문학에서 가장 지고한 목표는 "떠나기, 떠나기, 도주하기.... 지평선을 가로지르기, 다른 삶으로 스며들기..."입니다.
* 진정한 단절이란 우리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그로 인해 과거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피츠제랄드)
* 우리는 하나의 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 가장 불편한 위치이지요.
* 글쓰기는 도주선들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란 도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좋든 싫든 간에 마이너리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마이너리티란 결코 이미 만들어진 기성의 것이 아니며, 오직 전진하고 공격하는 양상을 보이는 도주선들 위에서만 구성됩니다.
* 여자든 남자든 간에 그(녀)의 글쓰기 마이너리티가 되어야 합니다.
* 자신의 고유한 계(界), 자신의 성(姓), 자기의 계급, 자신의 메이저리티를 배반하기 - 글을 쓰는 데 이것 왜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글쓰기를 배반하기.
* 배반이란 창조하는 것입니다. 배반자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얼굴을 잃어야 합니다.
* 결국 미지의 것이 된다는 것은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 위대한 비밀은 당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을 때,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당신을 붙잡을 수 없을 때 존재하지요. 비밀은 도처에 있고, 할 말은 하나도 없는 것이죠.
* 회상 없이, 환상 없이, 점을 만들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그저 흐름만이 남게 하세요. 때로는 메말라 버리고, 때로는 얼어붙거나 넘쳐흐르고, 때로는 서로 합류하기도 혹은 갈라지기도 하는 그런 흐름만 말이죠. 남자와 여자-이들은 흐름입니다.
* 가장 큰 잘못이자 유일한 잘못은 바로 도주선이 삶에서 달아나 상상계/상상적인 것이나 예술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믿는 일일 것입니다. 도주란 오히려 실재계/실재적인 것을 만들고, 삶을 창조하고, 무기를 발견하는 것이죠.
* 글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씌어집니다. 모든 글쓰기는 연애편지이지요. 다시 말해 실재적인-문학입니다.
* 단락이 길면 길수록, 더욱더 빨리 읽는 것이 좋다는 것, 그리고 반복되는 것들은 가속도록 작동해야 할 것이라는 것.
* 풀은 위대한 미경작지에서만 존재한다. 풀은 공터를 채운다. 풀은 다른 것들의 사이에서 자란다. 꽃은 아름답고 배추는 유용하고 양귀비는 당신을 미치게 하지만 풀은 넘쳐흐른다.(헨리 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