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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Dec 31. 2021

백합으로

  


 백합으로

  - 김정용


  내가 어미 소의 자궁에서 빠져나와 오 분도 되지 않아 다리를 후들거리며 일어서자 성가족은 박수를 치며 나를 맞았다 성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네 몫을 해야 한다고 어미 소는 나의 잔등을 혓바닥으로 핥아주었다 나는 나를 닮은 성가족의 아이를 따랐다 아이가 크는 만큼 함께 컸다 코뚜레 장식을 하고 백내장을 앓는 할머니가 멍에를 씌웠고 밧줄을 걸어 밭으로 인도 했다  돌밭에 이랑을 내었다 아이의 버드나무 회초리에 방향을 가늠했다 태산만 한 건초더미를 쌓아 올렸고 태산 높이의 잔돌맹이를 날랐다 만 명 분의 보리 밀을 수확했고 마을의 장례식 때마다 운구를 끌었으며 목례를 했다 언제든 길흉이 닿치면 번제물이 될 나라는 걸 알았고  개펄에 들어가 수레를 건져냈고 콩 밭에 잡풀을 먹어치웠으며 포만의 잠을 아이와 등을 맞대고 잤다 연료로 쓰일 쇠똥을 누고 아침이면 태양신을 향해 울었다 풀냄새 섞인 울음을 울면 아이가 이불 속에서 뒤척거렸고 먼 골짜기에 안개가 흘러왔다 잔등에 닿는 성가족의 손길을 느끼고 떨어져 있었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채식을 했다 간간 먼저 떠난 어미 소의 두개골이 백합으로 핀 꿈을 꾸고  마을의 처녀들이 시집가는 길을 먼 발치에서 배웅하고  먼 곳에서 시집 온 여인의 몰래 우는 울음소리를 내 울음소리로 가려 주었다 집집마다 아이를 낳는 산통이 있었고 건초더미에 얼굴을 묻고 함께 앓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밭일을 했고 마침내 아이는 퉁망울진 눈을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나는 흰 소에서 늙은 흰 소기 되고  백내장이 찾아오고 네 다리가 후들거리고 방향이 가늠이 되지 않고 마침내 아이가 나를 포기하고 밧줄을 끌어당기고 무릎걸음으로 마을의 도살장으로 가고 내장이 필요한 사람 꼬리가 필요한 사람 발굽이 필요한 사람이 기다리고 망치와 정이 정수리를 겨누었고 가죽이 필요한 사람이 벼린 칼로 나를 해체 했다 뼈를 발라 피리를 불려는 이도 찾아왔고 위장병을 고치겠다고 쓸개를 찾는 이도 왔다 마지막으로 소리국밥집 주인이 대가리를 가마솥에 사흘 밤낮을 삶았고 고기와 연골을 발랐고 텅 빈 두개골을 창 밖 냇물에 던져졌고 강으로 흘러가는 백 일 백야에 어미 소가 불렀다 아기야 백합의 골짜기로 오너라 백합의 골짜기에서 우리 흐드러지게 백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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