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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13. 2022

눈부시게


 눈부시게

  - 김정용



 살얼음을 덮고 있는 저수지는 사랑일까, 다만 눈부심일까

 고요 안으로 팔이 쑥 들어왔는데, 눈부시게 안기는 했으나, 부서지는 잔여


 아침 시간인데도 허기로 다가오는 오후

 아침 시간이 한 참 지났는데 허기가 찾아오지 않는 오후

 떡갈나무 잎새들 밟는 산책으로 가득 찬 허기의 오후

 

 흰 골짜기를 만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파고들어 가는 숲길

 눈부시게 무릎을 꿇으면 뿌리가 내리는 흰 골짜기

 아버지의 무릎, 사촌 막내형과 고종사촌 형의 무릎이 거기 뿌리내리고 흰 꽃을 소탈하게 피우고 있을 오후

  마스크 쓰고 공기 속을 걸어야 하는 이야기를 해주고 나면 윗니를 드러내는 아버지

 오늘이 하늘 안으로 가는 마룻길이다

 

 새들은 해석할 줄 몰라서 울음을 준다

 어린 풀들은 내일의 기도 같이 서 있다. 내일의 잔여분의 기도를 안고 있다

 어미의 벌린 입 안에 어린 새의 입이 쑥 들어간다

 나는 '입구야' 하고 발음한다. 발음에 살음이 낀다


 처박혀서 글이나 쓰고 살다 죽을 순 없으니. 함께 밥벌이 하는 이들이 내게 주는 시가 있을 거니까.

 우린 함께 눈부신 허기를 사니까

 아침 신발은 문 앞에서 얼어 있을 테지

 더운 발이 들어와도 한동안 빳빳하게 운신을 못할 테지

 눈부시게 부서지는 발걸음에 살얼음 소리가 날테지

 

 새들은 은폐하고, 까딱거리고,  부리로 쪼고, 날개로 허공을 긁고, 나머진 운다.  무엇이 있을 것이나, 눈부신 잔여분의 살얼음이 있을 것이나


  손 내밀면 존재의 목화도 내 것으로 오기까지 몇 개의 공정으로 거쳐야 하니, 그때 까지 기다려. 살얼음이 지상을 떠난 후에 오는 목화까지 기다려


 한 달 사이 벌거숭이 산을 만들어버리는 저 골리앗, 점심시간 사람들 없을 때 나무 작대기로 때려주었다, 맞은편 산이 메아리로 통쾌해했다. 한 대 더


  산 중에 텅 빈 걸음을 다시 하자. 배고픔을 연장하자. 입술이 사막이 될 때까지 마른 산책을 하자. 살얼음 떠나기 전 눈부시자


 국수 먹으면서, 이마를 번칠거리며 흰 눈빛 주고 받는 조화에게 눈부시자


 성당 옆을 지날 때 빛이 사선으로 나를 헤쳐나간다. 내가 빈빈하다 시를 쓰자 입에 쓴 물이 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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