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 김정용
살얼음을 덮고 있는 저수지는 사랑일까, 다만 눈부심일까
고요 안으로 팔이 쑥 들어왔는데, 눈부시게 안기는 했으나, 부서지는 잔여
아침 시간인데도 허기로 다가오는 오후
아침 시간이 한 참 지났는데 허기가 찾아오지 않는 오후
떡갈나무 잎새들 밟는 산책으로 가득 찬 허기의 오후
흰 골짜기를 만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파고들어 가는 숲길
눈부시게 무릎을 꿇으면 뿌리가 내리는 흰 골짜기
아버지의 무릎, 사촌 막내형과 고종사촌 형의 무릎이 거기 뿌리내리고 흰 꽃을 소탈하게 피우고 있을 오후
마스크 쓰고 공기 속을 걸어야 하는 이야기를 해주고 나면 윗니를 드러내는 아버지
오늘이 하늘 안으로 가는 마룻길이다
새들은 해석할 줄 몰라서 울음을 준다
어린 풀들은 내일의 기도 같이 서 있다. 내일의 잔여분의 기도를 안고 있다
어미의 벌린 입 안에 어린 새의 입이 쑥 들어간다
나는 '입구야' 하고 발음한다. 발음에 살음이 낀다
처박혀서 글이나 쓰고 살다 죽을 순 없으니. 함께 밥벌이 하는 이들이 내게 주는 시가 있을 거니까.
우린 함께 눈부신 허기를 사니까
아침 신발은 문 앞에서 얼어 있을 테지
더운 발이 들어와도 한동안 빳빳하게 운신을 못할 테지
눈부시게 부서지는 발걸음에 살얼음 소리가 날테지
새들은 은폐하고, 까딱거리고, 부리로 쪼고, 날개로 허공을 긁고, 나머진 운다. 더 무엇이 있을 것이나, 눈부신 잔여분의 살얼음이 있을 것이나
손 내밀면 존재의 목화도 내 것으로 오기까지 몇 개의 공정으로 거쳐야 하니, 그때 까지 기다려. 살얼음이 지상을 떠난 후에 오는 목화까지 기다려
한 달 사이 벌거숭이 산을 만들어버리는 저 골리앗, 점심시간 사람들 없을 때 나무 작대기로 때려주었다, 맞은편 산이 메아리로 통쾌해했다. 한 대 더
산 중에 텅 빈 걸음을 다시 하자. 배고픔을 연장하자. 입술이 사막이 될 때까지 마른 산책을 하자. 살얼음 떠나기 전 눈부시자
국수 먹으면서, 이마를 번칠거리며 흰 눈빛 주고 받는 조화에게 눈부시자
성당 옆을 지날 때 빛이 사선으로 나를 헤쳐나간다. 내가 빈빈하다 시를 쓰자 입에 쓴 물이 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