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가에서

창가에서-관점

2023, 6,11

by 일뤼미나시옹

관점


명석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의 반복이다. 어쩌다 한번 우연의 번개 치듯 뇌리를 스치는 어떤 깨달음이 아니다. 명석해지는 것은 사안이나 사태, 사건이나 현상을 되뇌고 천착하고 감각하며 동시에 체험하는 사이에 체득된다. 그림을 보든, 철학 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정원을 꾸미든, 산책을 하든, 운동을 하든,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다. 명석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극적인 인생의 개입이 필요하다.

인생의 개입. 그렇게 하지 않을 바에는 때려치우는 게 낫다.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이것을 내가 하려 하는가? 질문을 하지 않고 숙고하지 않고, 한다면 언제까지 할 것인가 자문자답 하지 않고 시작한 일은 오래가지 않을뿐더러 성급한 성과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모든 사안에는 윤리적 물음이 필요하다. 도덕성을 상기시키는 윤리가 아니라, 자기의 윤리성으로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찾아야 하기에, 윤리적 물음은 세상이 묻지 않고 흘려보내는 사안에 대해 존재의 확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잔의 흐리마리한 위의 그림에서 나는 본다. 희석된 듯한 의식의 명료함을. 왜 그는 희미하고 흐릿한 다리를 수채화를 통해 발현했을까. 같은 사안을 두고 여러 관점이 있듯, 세잔은 사물과 대상을 한 가지 진리의 방법으로 마침표 찍지 않지 않았다. 그는 오늘의 눈과 내일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예술은 한순간의 정열적인 감정의 발화도 필요하겠지만, 집요하게 천착하고 반복하는 관점과 빛의 발휘를 통한 다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존재의 물음도 그렇다, 오늘의 내 존재의 물음이 내일이면 다른 의문과 해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존재의 물음은 스스로의 물음과 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기호로 가득한 세계에서 오는 게 다반사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은 이미 세상에 누군가 했던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반복해서 그 말을 해야 한다. 왜냐면 내가 표현하는 감정, 색채의 구성, 스케치, 혹은 한 줄의 문장으로 내가 나를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재현은 매일 일어나고 매일 다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내 인생의 개입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게 내 인생의 개입을 타자의 개입에 따라간다. 타자뿐만 아니라, 대타자의 논리에 끌려간다.

세잔은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반음계의 음악을 작곡하듯이 색의 밀도와 강도의 변화로 이미지의 공간을 구조화하였다. 다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보이고 있다. 색상은 부드러운 곡선의 미끄러짐을 잘 이해하게 한다. 청자색의 풍경은 시원하고, 그늘진 자리는 풍경의 깊이를 돋보이게 한다. 이 색의 소용돌이에서 다리의 삼각형 모양은 흰색 덩어리가 솟아올라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리와 나무의 견고한 구조는 파란색 점과 대조를 이루면서 조화의 경이를 느끼게 한다. 희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색채의 푸른 점이 있는 흐린 다리가 있는 풍경.

삶에게도 이러한 관점이 시기가 있다. 인생에서 불 같이 뜨겁고 정열이 있었던 시기에도 그 사이에 이런 풍경 같은 빈 틈이 생긴다. 그런 날은 반드시 불화와 상처와 고통을 맛본 날일 것이다. 그런 날에는 빛에게 자기를 맡겨야 한다. 침묵과 눈에 가득 차오르는 빛에의 공기를 마시면 자기의식이 수채화처럼 명료해진다. 놓아줄 것들은 놓아주는 수채화. 빈틈없이 가득 채웠던 일상이 오히려 텅 빈 느낌일 때, 자기의식의 수채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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