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곳
그런 곳, 별것 아닌 곳. 비 온 후 젖은 땅에서 파란 풀이 돋는 곳. 숱한 이름 없는 풀이 돋는 곳. 산 아래 비탈진 곳. 낮은 개울물이 힘없이 흘러가는 곳. 봄풀 돋은 들판을 찾아온 서너 마리의 백로가 공중에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릴없는 곳. 비 온 후의 그곳, 어디에 가나 있는 그곳. 비 젖은 그곳, 땅 값이 오르지 않는 곳. 개발 호재가 없는 곳. 초록을 내놓는 나무들이 있는 곳. 바람이 불면 해묵은 솜털 같은 부들초 꽃가루가 날리는 곳. 백로와 왜가리가 젖은 발을 하고 우두망찰하는 곳. 목마른 새들이 발을 담그고 목을 축이는 작은 연밭이 있는 곳, 그런 곳.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나 외의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곳. 사람의 인생이 한 점의 추상화 같아지는 곳. 젖은 땅에 빗물에 씻긴 돌멩이마다 성찰의 무늬가 진 곳, 그런 곳. 햇살 세례를 받으며 희미한 발음 같은 혼잣말을 했는가 싶은 곳. 다녀오고 나면 사람의 등에 산그늘이 묻어나는 외딴곳. 쑥 뜯는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땅에 붙어 있는 곳. 사람에게서 멀리 물러나 있는 산이 있지만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산이 있는 곳, 그런 곳. 아무것도 아닌 곳, 어디에나 있고 별것 아닌 곳. 연초록을 내어놓는 가지 많은 나무 아래서 햇살 타격에 기뻐하는 나무의 '기쁨농도'를 생각해 보는 곳. 연초록을 내어주는 나무 아래 연초록 호흡을 하는 나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람을 닮은 나무가 있는 그런 곳. 들풀을 씹었던 산짐승의 발자국이 비 젖은 땅에 찍힌 곳, 그러나 4차로 국도변에 바로 면해 있는 곳. 야생 개의 습격에 가죽과 갈비뼈만 남은 고라니의 가죽에 파리 떼가 달라붙은 그런 곳. 닿지 않으면 상상도 안 되는 갖은 생물들의 생의 현장인 곳. 다가가면 온갖 풀들의 생과 돌들의 명상과 나무의 기력과 구름의 이동, 파란 하늘을 숭배하는 초록 이파리의 향연이 가득한 곳, 그런 곳. 곡우의 비가 내리고 나면 더 푸른 팽창을 펼치는 곳. 백로가 가루비누로 삶아낸 순면 같은 흰옷을 입고 있는 곳. 겨울의 검은 추상에서 연초록 추상이 펼쳐지는 곳. 근처 있는 그런 곳. 쓰레기 개울가 썩은 개울물도 삼보일배하듯 자정하고 자정하여 과일의 단맛으로 변하는 곳, 그런 곳. 빈손으로 서성거리고 바라보면 보이는 곳. 이름도 없고 유달리 볼 것도 없는 곳. 마늘밭이 펼쳐져 있고 봄의 기운이 돋는 채마밭의 노인이 흙빛의 얼굴을 하고 걷는 곳, 그런 곳. 사람이 동물이 되고, 사람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사람이 되는 곳. 힘없는 풀들이 빛을 받아 억세지고 추상의 대지에 색채의 음악이 돋아나는 곳. 그러나 찾아가야 하는 곳, 찾아가서는 응시해야 보이는 곳, 대지와 날개와 빛과 그늘의 근원적인 시선을 가져야 하는 곳.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곳, 그 무엇도 감각할 수 없는 곳. 그런 곳, 평범하고 별 것 없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