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가에서

창가에서 - 곡우(穀雨)

by 일뤼미나시옹

곡우(穀雨)


버스 창에 기댄 아가씨의 입 벌린 잠. 그 잠은 퇴근하는 잠인가. 여행하는 잠인가. 귀향하는 잠인가. 실패한 청춘의 잠인가. 연애의 잠인가. 아니면 봄잠인가. 간이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는 잠깐 동안, 버스 창으로 살구꽃그림자가 드리워 그녀의 얼굴에 겹쳐진다. 버스는 도시의 변두리를 돌고 돌아 시골로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는 중이다. 도시의 어느 변두리에서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탄 그녀의 얼굴에 살구꽃그림자는 설핏한 그녀의 잠 속에 아무런 저촉 없이 방해 없이 간지럼 없이 문신처럼 드리워진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세상의 한편에서 보퉁이를 끌어안고 차를 기다리던 여인을. 지나버린 세월의 필름 속에 한 컷으로 바래있는 소읍의 버스정류소 나무의자에 앉았던 여인을. 지금도 세상의 어느 한편에 그런 차림의 여자가 있겠지. 봄의 한 구석진 간이버스정류장에서 보퉁이를 끌어안고 차를 기다리거나, 기차를 기다리는 여인. 혹은 동행할 사내를 기다리는 여인. 있을까? 정말 있을까?

차창에 기댄 잠의 여인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사월의 봄 차창에 기댄 피로는 어떤 피로일까. 봄이 주는 춘곤증의 피로일까. 생의 결핍에 의한 피로일까. 실패한 연애의 피로일까. 결말 없는 공부의 미궁의 피로일까. 버스가 출발했다. 살구꽃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났다. 살구꽃그림자는 아스팔트에 던져졌다. 나는 그녀의 귓속에 케니 도헴의 트럼펫 소리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케니 도헴의 트럼펫은 살구꽃을 흩트리게 한다. 늙은 나무의 맨 윗가지들은 올 봄에 태어난 가지들. 그 가지들의 살갗을 뚫고 나온 연분홍 살구꽃의 화관. 화관의 수명은 열흘 남짓. 간이버스 정류장은 비고, 마른 흙먼지 의자 밑에 쌓이고, 신작로 건너 빈들에 봄 먼지가 무연히 일어나 치마 입은 여인처럼 무연히 일어나서 춤추듯 회오리바람으로 들판을 건너가다 사라진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잠의 여인이여. 눈 뜨면 어디가 어딘지 자기의 목적지도 없어져버리는 잠이여. 비단 같은 잠의 숨결은 어디로 갔고, 비단을 잣던 잠의 숨결이 끝난 당신의 눈에는 불그레한 핏발이 들어서고. 그래도 당신의 눈에 든 이 꽃무늬 핏발로 당신은 천천히 버스에 내려 희미하고 굴곡진 시멘트 포장의

시골길을 걸을 것이다. 그날은 곡우이고. 곡우라는 발음의 느낌대로 당신은 걸을 것이다. 아무도 마중 없는 황량한 시멘트 포장길을 걸을 것이다. 달디 단 곡우의 비를 기다리는 마른 들판을 비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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