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가는 사람
들판은 말라있다. 책을 읽어나가다 밑줄을 그은 것처럼 들판에는 경운기바퀴 자국이 남아 있다. 북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흙먼지가 부연이 일어나 남으로 회오리 춤을 추면 달려간다. 이 벌판에 눈이 오면 나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무연히 눈 구경을 한다. 들판너머 기차가 달리면 더없이 기분은 배가 된다. 이 들판에 봄이 오고 봄물이 들어 질퍽해지면 먼 데서 흰 옷 입은 새들이 토주 신은 발레리나처럼 논바닥을 디딘다. 이 광경은 아침이면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다. 이 들판에 여름이 오고 모내기한 논이 퍼렇게 변했을 때도 좋다. 개구리울음이 초등학교 운동장의 점심시간 마냥 시끌시끌한 여름. 논배미의 물컹한 물흙이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때의 그 미끈함이 또한 좋다. 이 벌판에 겨울이 찾아오고 지금은 거무튀튀한 흙먼지가 일어나고 사람도 새도 없는 텅 빈 들판은 펼쳐놓은 책인 듯한데 책 중에서도 난해한 철학책 같기도 하고, 오래되어 바래버린 고서적 같기도 하여 문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벌판에 어둠이 꿀밤묵처럼 두터워지려는 때가 되면 매일 같이 한 남자가 나타나 국도변 마른풀 번진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펴고 읽는다. 잔영이 책 위에 얹혀 있어 남자의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남자는 산그늘을 묻혀 온 듯 어둡고 얼굴이 모자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매일 같이 이 자리에서 대구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그 막간을 이용해 시린 손으로 책을 펴고 읽는 책. 나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하지 않다. 지금 남자는 겨울들판 같은 책을 들고 읽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책을 읽으며 등을 보일 때 나는 점점 그가 어떤 책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분명 아주 두껍고 숱한 사연이 들어있는 자기만의 책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도 읽지 못하고 읽히고 싶지도 않은 책이 되어 가는 중인 것이다. 어느 날은 내가 그가 가는 방향으로 차를 태워줄까 물어도 그는 겸손하게 사양하고선 이내 책에다 얼굴을 가져갔다. 묘사된 문장처럼 가로등 불빛이 켜진다. 남자는 세상의 어떤 모서리 같은 가방을 열고 책을 넣는다. 버스가 저만치 교회 앞 내리막을 미끄러져오고 있다. 남자의 몸은 이제 훈기 있는 버스 안에서 한 권의 접힌 책이 되어 의자에 꽂혀 갈 것이다. 책을 읽으며 책이 되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저 들판이 가진 숱한 문자의 내력을 나는 언젠가 꼭 한 번 기록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