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잖아 벚꽃
우리는 비대했기에 육중하기에 함께 부풀어 올랐기에 서로를 밀어낼 수 없었다. 우리는 같은 욕망의 구조 안에 살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연결하고 소통하고 만나고 살을 비비고 반대의견을 내고 동질감을 느끼고 연대하면서 함께 공동의 생을 영위했다. 물질적으로 같은 욕망의 구조를 가졌고. 그 속에서 견디고 살피고 모색했다. 우리는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견고하게 그리고 보다 완고하게 구축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중심부에서 똘똘 뭉쳐 살았던 몸들이 사방팔방으로, 구석진 곳으로 달아났다. 사라졌다. 격리되고, 이웃의 몸이 오염되었나 의심하고, 너의 몸을 혐오로 의심하게 되고, 먼 그들의 몸을 비정상의 신체로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웃이 망각된다. 몸들은 스스로를 감금하고. 문을 닫아건다. 열린 창과 빛과 바람과 공기를 두려워하고 세상의 어수선한 말들이 진실로 떠돌아다닌다. 몸들은 술렁거리고 눈치 보고 자기 모색을 꾀하고 오로지 ‘나-지금의-몸’에 매달린다. 덩달아 몸들이 영위하던 일상도 함께 멈추고 격리된다. 일상은 작동을 멈추고 결손이 생기고 관계 설정의 고리가 끊긴다. 덩달아 이웃의 몸들의 일상에도 근접할 수 없어 되었다. 몸들은 멀리 달아났다. 몸들은 하룻밤 사이에 서로를 밀쳐내야 했고 의심해야 했고, 예약한 주문한 후라이드 치킨 계산을 하기 위해 카드를 내민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튕겨 나가는 격한 반응체의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게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여기- 몸’이란 무엇인가. 이전의 몸은 무엇이었으며 미래의 몸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 몸이 수많은 몸들을 파괴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고, 저 몸이 내 몸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공포의 증폭. 어느 날 갑자기 세계가 좁아져버렸다. 전날까지 겪어냈던 실질적 세계에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이 몸은 어떤 목적의 몸이어야 하며, 어디까지 개발할 수 있는 몸이어야 할까. 그리고 이 몸은 어느 방향으로 어느 바깥으로 멀어질 수 몸이 될 수 있을까. 이제 몸들은 자기의 반경을 좁힐 것이며, 세계의 범위를 축소할 것이며, 가상의 세계에 더 함몰할 것이다. 불과 두 달 전의 몸들은 한통속이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이해관계로 친족관계의 몸으로 한통속이었다. 몸들은 섞이고 밀치고 애무하고 매무새를 고쳐주고 바라보고 선망하고 살을 나누었다. 불과 두 달 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제 몸은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해야 한다. 이제 몸들은 ‘바깥의 몸’이 되어버렸다. 너에게 멀리 있는 몸, 서로 떨어져야 하는 몸, 당분간의 몸이 되어버렸다. 몸은 지금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몸은 지금 달아나지도 말아야 하며 몸은 지금 이 자리에 자기를 못 박아야 한다. 함께 숨을 나누고 함께 고통을 나누던 ‘타자의 몸’은 이제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몸들은 스스로에게 조차 바깥이 되었고, 낯선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벚꽃이 피는 봄날에 몸들은 저 바깥 사물의 세계를 다시 살아 보려 한다. 얼마나 찬란한가. 햇살에 봄이, 햇살의 꽃이, 햇살에 자기 살결이, 햇살에 자기 숨결이 얼마나 찬란한지 살아보려 할 것이다. 몸. 이 경멸과 애증과 욕망의 살결 숨결 애무 근육 통증 노동의 집합체인 몸. 몸을 몸으로 살아내는 법. 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는 머잖아 벚꽃 필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