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에바 캐시디는 서른 셋에 죽었다. 평생 남의 노래만 불렀다. 살아있는 동안에 별 볼일 없는 가수에 다름 아니었다. 자기 노래가 없었던 탓이다. 그녀가 죽자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재평가했다. 에바 캐시디는 남의 노래를 자기 노래로 바꿔 불렀다. 남의 노래에 자기를 불어넣었다. 남의 노래에 자기 생을 실었다. 노래가 끝나면 몸에 한기가 찾아온다. 이 한기, 는 애바 캐시디의 생이다. 그렇게 죽을 수 없을까. 노래만 듣다가 죽을 수는 없을까. 나는 다만 그렇게라도 죽음을 만난다면 좋을 것이다. 한편, 시인들은 어떤가. 평생 자기 노래만 찾아 헤맨다. 자기 노래가 세상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 지금 시인들의 노래는 밤의 붉은 십자가 같다. 노래는 가지가지지만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 노래가 세상을 적시는가. 세상이 노래를 기다리는가. 혼신으로 노래 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방에서의 외침. 우리 시대 시인들의 초상이여. 외침과 노래는 다른 것.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아무리 애써 불러보아도 절대 미학의 한 소절은, 알면서도 다다를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