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가에서

창가에서 - 재즈 피아노 솔로

by 일뤼미나시옹

재즈 피아노 솔로

피아노는 느리다. 늙으신 아버지가 걷는 듯이 느리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걸음 같다. 피아노는 흐리다. 중회색의 늦가을이다. 비 맞는 돌이다. 빗물에 푹 젖은 돌이다. 고요하게 내리는 빗줄기. 오로지 비에 젖는 것에 몰두하는 돌이 보인다. 나는 41분 동안, 이 피아노와 함께 늦가을의 어느 새벽을 함께 한다. 일 년을 사는 동안 얼만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살까. 피아노는 무겁고 두터운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자기 그림자를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나무를 보여 준다. 이 피아노의 무거움을 어떻게 감당할까.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가 되어 본다. 음악을 듣는 사과나무다. 차오르는 뜨거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과나무다. 아랫배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움을 열매로 매다는 사과나무다. 뜨거운 사과는 바람 속에서 출렁거린다. 붉은 눈동자들이 공중에 출렁거린다.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는 아이들의 얼굴 같은 출렁거림. 한 알의 사과가 떨어진다. 아주 기쁘게 떨어진다. 땅이 떨어진 사과를 안아 준다. 몇 바퀴 사과가 지상을 애무하며 뒹군다. 최초와 최초의 만남이다. 다시 피아노는 사과나무를 보여 준다. 낯선 사람의 손에 떨어져 나간 사과의 온기가 피아노의 어떤 한 순간의 음에서 느껴진다. 피아노는 여전히 느리다. 낯선 도시에로의 여행 같은 불안감. 지하 다방의 무겁고 축축한 공기의 맛을 풍긴다. 시계가 갑자기 보고 싶다. 새벽 5시가 넘었다. 정확한 보폭의 시침을 잠시 본다. 피아노의 보폭과 전혀 다른 걸음. 피아노는 여전히 느리다. 무거운 겨울 코트를 입은 몸이다. 무언가가 내 속에 폭발을 일으킬 듯이 피아노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단풍든 나뭇잎이 신작로로 쏟아지듯, 피아노는 검고, 무거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중회색의 피아노는 축축하다. 빗물에 푹 젖은 겉옷이다. 가위눌린 잠이다. 팔을 휘젓는 취객의 몸처럼 피아노는 느리고 불명확하다. 더 강렬한 어떤 에너지를 분출하기 직전의 징조다. 도박장의 얼굴들처럼 긴장과 탐색. 빛이 보이지 않는다. 피아노는 마치 공장의 화재에서 일어난 검은 연기처럼 공기 속을 무겁게 떠돈다. 발목을 휘감는 축축한 안개처럼 내 주위를 감싼다.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의 어둠이다. 갑자기 피아노의 진행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전환을 보여준다. 어느 날 문득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거울에서 보듯, 피아노는 속도를 내고 혼돈과 격정을 내뿜는다. 겨울바람에 휘둘리는 수양버들 같다. 한 덩어리로 흔들리면서 무수한 가지들은 그 안에 가지각색의 선을 보여 준다. 線, 線, 무수한 선의 난립. 바람 안에 무수한 선을 새겨 넣는 겨울 나뭇가지. 곡선; 당신의 어머니, 흙물에 더렵혀진 화분에 난 겨울 잡초의 허리, 곡선은 나의 질투, 물의 휴식, 탈색되는 나뭇잎의 시간, 곡선은 당신의 어깨, 어떻게 할 수 없는 썩은 과일의 부위, 곡선은 고양이. 직선; 끝끝내 말하지 않는 침묵. 직선은 자살이며, 이별. 직선은 허공. 직선은 추운 어깨. 직선은 더 이상 볼 수 없음. 피아노는 세상 끝까지 밀려난 물, 더는 갈 곳 없는 물의 요동이 되었다. 갈 곳 없는 물은 자기 안에 상처를 낸다. 자기 내부의 간질을 일으킨다. 짓밟고 물어뜯고, 찢어발긴다. 물의 요동은 거대한 분노처럼, 회한처럼 부풀어 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물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삶처럼. 피아노는 물의 요동을 계속 보여준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 같은 맑은 음이 한 순간 반짝거린다. 그러면서 피아노는 다시 어떤 폐허를 보여준다. 전쟁의 폐허를, 상심한 마음의 폐허를, 분노한 다음의 마음의 폐허를, 절망한 마음의 폐허를, 혼자서 기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러다 내 마음에 이끼가 끼겠다. 두 손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얹힌다. 두 손에는 가슴에 우러난 그 무엇이 묻어난다. 두 손은 그것을 펼친다. 그리고 얼굴을 감싼다. 고흐가 죽었던 날의 밤 같은 적막이 두 손에 있었다.(VIENNA, PART I / VIENNA CONCERT/Keith Jarrett,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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