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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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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0. 2023

창가에서 - 개구멍

 개구멍


 큰어머니 돌아가신 빈집에 이사를 하고 맨 처음 내가 한 일은 개의 목줄을 풀어주고, 미친 듯이 너른 마당을 뛰어다니는 개의 기쁜 몸을 보는 것이었다. 목줄 풀어주고 여러 날 지나 개는 대문 아래 흙을 파헤쳐 개구멍을 만들어 집 밖을 나가기 시작했다. 대문 밖은 곧장 차도여서 불안했지만 개는 여러 시간을 어딜 돌아다니다 돌아왔다. 나는 그간의 묶였던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는 심정으로 개가 파놓은 개구멍을 막지 않고 그냥 두었다.

바람 몹시 불고 큰 비 내리기 전에 집 나간 개가 돌아오질 않았다. 빗물이 개구멍을 가득히 메워, 들어오기가 막막할 것 같아 대문을 살짝 열어두었지만 개는 돌아오질 않았다. 이튿날이 되어도 개는 돌아오질 않아 아주 먼 길을 작정하고 나선 것이라 생각하고 내심 포기하려는 사흘째 되던 날 개는 외출하고 돌아온 틈에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 처음 만들어놓은 구멍 속으로 뱃바닥을 끌며 돌아온 것이다.

개구멍, 내게도 저런 구멍이 있는가. 내 안과 밖이 꽉 조여지는 구멍 있는가. 뚫린 구멍을 온몸으로 채워주어야 나갈 수 있는 자유, 방탕함이 허용되는 구멍. 내게도 그런 구멍이 있는가. 기어코 빠져나가선 허기지고 맥 빠진 모습으로 다시 찾아 돌아오는 구멍. 제 발길이 어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앞만 보고 가는 배회와 빗줄기 퍼붓고 바람 불어도 집 생각나지 않는 배회. 내 안팎이 기진맥진해 다시 찾아오는 구멍. 간신히 그 구멍 속으로 내가 머리 들이밀면 나를 통째 받아내는 구멍. 내게도 그런 구멍이 있는가. 구멍 밖으로 나가면 종적 묘연해지는 그런 구멍이.

깨끗이 핥아놓은 사기 밥그릇에 햇빛 챙챙 하고, 기다란 혓바닥으로 제 눈에 눈물 닦아내며 나를 한 번 쳐다본 개는 쫑긋한 큰 귀를 내리고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긴 방황의 피로가 서린 개의 몸에 가을 햇살 쏟아지고 나는 개가 파헤친 개구멍을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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