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림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뤼미나시옹 Jan 03. 2019

제목에 매달리지 않아야 하듯



그림의 제목에 매달리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무제'의 그림들은 모두 '무제'를 만들어낸 감상자의 몫이다.

'무제'를 만든다는 것은,

화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의 '무제는 변이의 무제, 확장되는 무제이며

무한한 긍정의 가능성의 '무제'이다.

낡은 사고에 갇힌 

자아가 강한 이들은 기어코 

'무제'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찾고, 자기 정체성의 곧이 곧대로

'무제'에게 강제하려 한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가진 것의 절대를 대상에게

상대에게 강제하고 강요하려 한다.

사람의 나이는 오십이 되어서야 겨우 관계망에서

자아의 형성에서 폭이 넓어지고 안정화에 든다고 한다.

안정화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수많은 변이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의 지혜를 체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일찍 노인이 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지독히 '자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생기란, 나쁜 뜻에서의 생기다.

오로지 내 생각의 틀에 갇혀서 절대 남의 

이야기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이가 '거울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는

팔과 다리가 자기의 것인지 알지 못한다.

거울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내가 있다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아이는 자아의 형성으로 단계로 들어서게 됨으로써

가능성의 아이는 사라지고 분별되고 고집스러운 자기 협소화의 단계로 들어선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형성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거울단계'에 들어서기 전에는 뇌의 신경세포들은 1,000조 개의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지만, 

자아가 형성되면서 2/3의 시냅스는 단절시킨다. 즉

다양할 될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자아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달리 해석해서 말한다면, 우리

삶의 모든 나날은 '무제'의 날들이지만

'무제'의 날들은 자아의 고집대로 굳이 비끌어 매어

'제목'에 의미를, 가치를, 나의 고집에 붙들어 맨다면

사람과의 관계망도 경직된 틀 안에서 재단되고 마는 것이다. 

숱한 가능성의 자기를 만들려면, 진정 '자아'가 없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즉 열려 있는 자아, 내가 매일 죽고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자아의 상태

'무제'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기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고

광활하게 열려 있는 변이성을 가진 존재.

나는 그런 인간을 사랑하고

그런 인간의 삶을 살고자 한다.

가능할까의 물음 조차 의미가 없다.

가능하다 않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태를 살고자 할 때

가능성이, 변이성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내 안에 누군가가 계속 죽고 태어나는 것

모리스 블랑쇼는 이를 두고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또 다른 나는 태어나지 않는다

불변의나를원하려면변화무쌍한나를태어나게해야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