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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05. 2019

나로 있다는 것.

전체성과 무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실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통과 즐거움으로 실존한다. 그 자신의 활동 자체로부터 영양을 취하는 행위의 이러한 방식이 바로 향유다. 그러므로 빵을 먹고 사는 것은 빵을 스스로에게 재현하는 것도, 빵에 대해 행동하는 것도, 빵에 의해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자신의 빵을 벌어야 하며, 자신의 빵을 벌기 위해서는 영양을 취해야 한다. 내가 먹는 빵은 또한 내가 나의 빵을 벌고 나의 삶을 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노동하고 살기 위하여 나의 빵을 먹는다면, 나는 나의 노동으로 사는 것이자 나의 빵으로 사는 것이다. 빵과 노동은 실존의 적나라한 사실에서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것도 아니며, 내 시간이 공허를 메우는 것도 아니다. 향유는 나의 삶을 채우는 내용들 모두에 대한 궁극적 의식이다. 향유는 그 내용들을 끌어 안는다. 내가 버는 삶은 벌거벗은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먹을거리의 삶이다. 삶에 몰두케 할 뿐만 아니라 삶을 '차지하고'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은 여기의 이 내용들이다. 삶은 이 내용들의 향유다. 비록 삶의 내용이 나의 삶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방편은 곧바로 목적으로서 추구되며, 이 목적의 추구가 다시 또 목적이 된다. 그래서 물건들은 언제나 엄격하게 필요한 것보다 많아지고, 이것들이 삶의 우아함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우리의 노동으로 산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노동이 삶을 채우 주기(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기) 때문에 그 노동으로 산다. '자신의 노동으로 산다'라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사태가 정상적일 경우- 이 두 번째 의미로 귀착한다. 보이는 대상이 대상으로서의 삶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상을 봄이 삶의 '기쁨'을 만든다.  여기에 봄(vision)에 대한 봄(vision)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물에 대한 삶의 고유한 의존과 삶이 맺는 관계가 향유다. 향유는 행복으로서 독립이기도 하다. 삶의 행위들은 직선적이 아니며, 그 목적성을 향해 당겨져 있지도 않다.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의식에 대한 이 의식은 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앎이 아니라 향유며, 우리가 나중에 얘기할 것처럼, 삶의 에고이즘 자체다. .......


......어떤 것으로 산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생명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했다. 삶은 호흡과 영양 섭취에 의해 공급되는 연료를 찾고 소비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은 지상과 천상의 먹을거리들을 즐기는 데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이 삶이 아닌 것에 의존한다 했다. 이 의존은 결국 그것을 무효화하는 반대편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으로 사는 바의 것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향유한다........ 나로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 가운데서 존재 위에 이미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자아에게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을 자신과 대립시키거나 자신에게 재현하거나 어떤 것을 이용하거나 어떤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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