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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12. 2019

검은 배경에 화병

피카소



   세월이 흘러, 노모도 돌아가시고, 혼자서 텔레비전도 없는 방, 가고 싶었던 사막, <팀 벅투>에도 못 가보고 백발노인이 되어서, 몸에는 피질에서 몸 냄새가 풍기고, 책장의 책들은 누렇게 바래, 펼쳐진 책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까무룩 해지다가, 어느 날 아침 가스레인지 불 끄는 것도 잊고 대문 닫는 것도 잊고, 백발에 혼백이 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되고,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 전화기에 뽀얀 먼지가 쌓이고, 방에는 냄비와 반찬 그릇이 널브러져 있고, 나는 혼자서 무의식에 각인된  어떤 이름만 부르게 될 때,  내 생에 각인된 너의 이름을 왼 종일 중얼거리지만 정작 내가 부르는 이름의 이미지는 나의 머릿속에 없고, 키우는 화분의 꽃이 나의 발음을 기억해 주려나, 달밤 바깥 나무의 그림자가 창에 비칠 때, 나는 또 한 번 너의 환영에  이름을 부르고. 그렇게 여러 날이 가고 나는 완전히 내가 누구인지 일체의 정체성을 드러낼 만한 언어도 발음도 잊게 된다면. 아, 나는 그제야 내 생의 끝을 마감하는 것이 되겠지. 그러나 그런 날이 오기가 두려우니, 나는 어서 빨리 사막에 가서 붉은 사막을 눈 앞에 펼쳐 놓고 내 전생 붉은 사막 앞 오백 년 신기루와 맞대면했던 자세로 서 있다가 풍화되고 싶구나.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때까지 너의 이름이 마지막 한 음절의 노랫말처럼 희미하게 발음되고. 입술이 기억하는 한 이름이, 화병에 핀 꽃처럼 발음된다면, 그것으로 내 생의 종지부를 찍어도 괜찮은 듯 싶구나. 


Pablo Picasso - A Pot of Flowers on a Black Background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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