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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18. 2019

에크리écrire

자크 라캉


*현실은 상징들과 의미작용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실재계는 사회적. 상징적 우주와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가지며 그 극한에 존재하는 미지의 것이다.


*존재란 사고와 언어의 산물이며, 실재계는 언어에 선행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실재계는 사회현실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그 현실을 훼손시킨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언어로 상징화시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항상 어떤 것이 남겨지게 된다. 언어를 통해 변형될 수 없는 이 초과분이 바로 실재계이다.


*실재계란 거리에 뱉어진 추잉껌과 같이 신발 뒤축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일상적 관찰에서 실재계는 허기와 같은 욕구의 형태로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맹목적인 전상징계적 현실이다. 실재계는 욕구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상징화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에서 전상징계적이다.


*정신분석에서의 외상은 정신적 사건을 의미한다. 정신적 외상은 주체가 외부자극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대면했을 때 생겨난다. 프로이트에게 외상이라는 개념은 아이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실제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원장면과 연관된다. 외상이 상징화될 수 없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실재계이며 주체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영속적 어긋남이다.


*억압된 것은 이미지, 단어, 감정보다 한층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프로이트도 이 부분을 감지했는데, 이를테면 꿈속에는 '꿈의 배꼽'이라는 단단한 불가입적 중핵이 있다고 추측했다. 억압된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불가입성 중핵이다. 상징계 안에 존재하는 실재계의 중핵은 빈자리로 인식되며 모든 표상들, 이미지들 그리고 기표들은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 이 억압된 요소가 das Ding(물:物)이다.


*物은 기의 너머를 가리키며 그 자체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하는 상실된 대상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실된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잃어버릴 수도 없었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이며 단지 사후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다.



*物은 무(no-thing)이며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근원적인 物이 상실되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주체성과 상징계와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物을 생성한 것이다.


*무의식적 욕망들은 환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즉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환상 공간은 욕망들을 영사하기 위한 일종의 스크린과 같이 비어 있는 표면의 역할을 한다. (지젝)


*대상 a는 타자의 결여를 표상하며, 결여된 특정대상이라기 보다는 결여 자체를 뜻한다. 즉 욕망은 어떠한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대상 a는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이 결여되었거나 상실되었다는, 우리가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지속적인 느낌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메우려고 애쓰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백 또는 심연으로서의 실재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대상 a는 공백이자 간극인 동시에 결여를 덮어 가리는 기능을 한다.


*대상a는 의미화 연쇄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연쇄 안의 구멍이다. 그것은 파괴하는 동시에 수선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틈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덮어씌우기 위해 결여의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 a는 대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겨진 잔여이다. 그것은 상징화의 수중에서 교묘히 벗어나는 파편이다. 대상 a는 다르게 말하여 실재계의 잔여이며 환상은 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정의한다.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다. (죽음 충동)


*하나의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움직이는 욕망과는 반대로, 주이상스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주이상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재나 불충분한 느낌을 통해 그것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통제나 제어가 불가능한 실재계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환상을 통해 사회현실을 구성한다.

*스투디움(studium)이 사진에 의해 자극되는 문화적 흥미의 일반적 영역이라면, 풍크툼(pundum)은 더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를 관통하여 찌르고 지나가지만, 우리를 상처 입히는 동시에 강렬한 감동을 준다. 스투디움이 사진에 대한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느낌을 가리킨다면 풍크툼은 그 매끄러운 표면에 균열을 내는 세부(detail)이다. 풍크툼은 우리를 하나의 연상에서 다른 연상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확장적이고 환유적인 역량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후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사진을 보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 생각할 때 기억나는 세부이다. (바르트)


*외상은 상처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로부터 파생된다.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라틴어는 풍크툼이다. (빅터 버긴)


*우리를 관통하여 상처를 입히고 사진의 스투디움(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바르트의 세부는 대상 a라는 형태를 통한 실재계와 섬광 같은 만남과 상응한다.


*본질적으로 정신분석은 우리를 회피하는 실재계와 조우하는 것이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주체성과 상징계의 심부에 있는 외상적 중핵이다. 그러므로 실재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로서, 죽음충동 및 주이상스와 연계된다. 주이상스는 욕망에 대비되는 것이며, 주체는 환상과 대상 a를 통하여 이 불가능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실재계는 무엇보다 상징계가 주체의 의미 세계인 현실로부터 배제한 부분으로, 상징화를 벗어나는 영역을 모두 실재라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나타나는 환상, 주체가 태어날 때 잃어버리는 어떤 것, 언어적 질서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의 찌꺼기.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한 성관계 등이 그것이다. 상징화에 저항하고 기표들의 질서에 동화되지 않는 모든 질서이다.


*실재계란 언어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실재계는 사실상 주체에게 허용되지 않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부정적 효과로서만 간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실재는 불가능하지만 절대적인 것이기에 언어적 착오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애매한 글쓰기 혹은 의미를 비틀면서 '반쯤 말하기'가 필요하다.


*실재는 결여 형태로 체험하는 상징계의 구멍들은 실재계의 역설적 존재를 보여준다.


*욕망 때문에 금지가 생기는 게 아니라, 금지가 욕망을 부른다.


*무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상징 기능이 자치권을 얻게 되는 단순히 빈 공간이며 다시 말하면 상징들이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보다 더욱 진실해지는 공간이다. (레비스트로스)


*무의식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우리가 언어를 말한다기보다 언어가 우리를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없이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 또한 언어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란 기표들의 효과이며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하여 형상화된다.


*무의식의 작용과 서술은 늘 언어적 유희를 통해 반복되고 빗나가면서 고정된 의미화를 벗어나는 시니피앙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머무는 게 아니라 '나의' 욕망의 언어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


*무의식 시제는 순수 과거도 순수 현재도 아닌 '사후 작용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규정된다.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적 존재이고 언어는 언제나 인간을 속인다.


*욕망의 만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오는 인정이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구조화된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을 한다.


*무의식은 주체의 내밀한 욕망이나 억압된 표상과 기억의 공간이 아니라, 주체에 작용하는 말의 효과이다.


*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것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것조차 타자 속에서만 가능하다.


*주체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언어적 경험이 되풀이되면서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언어가 주체를 착각하게 만든다.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존재성을 획득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주체의 사라짐을 가져온다.


*진리를 진리로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초월적 언어는 없다.


* 주체가 알 수 없는 말의 효과, 주체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반복하는 말의 작용이 바로 무의식이다.


*거짓이 때로는 사실보다 더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데 진정한 주체는 담론 속에 있지 않고 그것을 비틀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어가 욕망의 전체 조건이자 욕망을 지속시키는 근본 원인이다. 언어가 없으면 욕망도 발생하지 않는다.


*담론이 분열되는 것은 최종적으로 진리의 장소인 대타자 역시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언어의 장소이므로, 자신을 언어로 묘사하면서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결여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화의 질서를 벗어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정신병자의 언어적 구조는 은유 능력의 결여에 있다. 은유란 시적 창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것은 주체가 상징계의 질서를 온전히 수용할 때 가능하다.

*진리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그것은 바로 욕망의 목소리다.


*언술 행위의 주체가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이 진리의 순간이다. 이 순간은 언표 주체가 실격하는 틈을 비집고 언술 행위의 주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므로, 이러한 진실의 틈은 의도적인 것이 깨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말을 하면서 언표 주체를 속이는 행위를 '반쯤 말하기' 전략이라고 하는데 농담이나 말실수가 그런 것이다.


*문체는 그 사람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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