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실재계란 무엇인가?
실재계(the Real)매우 난해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라캉의 개념 중 하나이다. 실개계를 이해하는 데 발생하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사물'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것은 세상의 물질적 대상이나 인간의 신체가 아니며 심지어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라캉에게 현실이란 상징들과 의미작용의 과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징계 또는 '사회현실'과 연관된다. 실재계는 사회적.상징적. 우주와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가지며 그 극한에 존재하는 미지의 것이다. 실재계 또한 매우 역설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현실의 기반이 되며 -사회현실은 실재계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그 현실을 훼손시킨다. 실재계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이유는 라캉의 실재계에 대한 개념화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재계라는 개념이 비교적 미분화된 형태로 남아있던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라캉이 상상계와 상징계의 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실재계를 이용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1964년에서 1970년 초까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실재계가 라캉의 사상에서 중심 범주로 고양되는 그의 후기 저작까지 실재계의 발전과정을 따라갈 것이다. 라캉의 사상이 변화하는 각 단계를 통해 실재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달라지지만 그 개념에 대한 이전의 정의와 기능들은 지속된다. 그러므로 라캉의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실재계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우리는 그의 이전 연구들을 재평가하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후기 라캉에서 실재계는 환상, 대상a 그리고 주이상스의 기능을 이해하지 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는 개념이다. 우리는 주요 개념들을 차례로 언급한 후 롤랑 바르트의 감탄할 만한 마지막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 Camera Lucida>> 를 통해 실재계의 기능을 살펴볼 것이다.
실재계는 항상 제자리에 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라캉의 창조적 에너지는 기표와 상징계의 역할을 설명해 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시기에 실재계는 그의 체계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아직 비교적 미분화된 상태였다. 라캉은 1960년대에 발표된 그의 논문들에서 실재계라는 개념을 사용했지만 이 초기 저작들에서 실재계는 기본적으로 '절대적 존재 (absolute being)' 또는 '즉자적 존재(bing-in-itself)를 가리키는 철학적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실재계는 거울단계의 상상계에 대비되어 구상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계는 '즉자적 존재'로서 현상과 이미지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으로 정의 되었다.
1954-1955년이 포우 세미나에서 실재계는 결정적인 수정과정을 거치며 세 개의 범주 중 하나로 격상된다. '제자리에 머무는 것(that which remains in its place)'으로서의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 모두에 대립되었다. 실재계란 거리에 뱉어진 추잉껌과 같이 신발 뒤축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설명으로부터, 라캉이 이시기에는 살재계를 비교적 저급한 수준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초기 세미나에서 실재계는 '구체적 concrete'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상징화 이전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적나라한 물질성(brute materiality) 이다. 임상적 관점에서 실재계는 허기와 같은 욕구의 형태로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맹목적인 전상징계적(pre-symbolic) 현실이다. 그러므로 실재계는 상징화되기 이전의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지만, 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실재계는 허기를 일으키는 욕구이며 그것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가 배고픔을 느낄 때, 이 욕구는 유방 또는 인공수유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만족될 수 있으나 유방과 우유병은 배고픔에 관련된 대상들이며,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이 대상들은 결코 유아의 요구를 전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상상계적인(imaginary) 것이다. 실재계는 욕구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상징화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에서 전상징계적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실재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재계는 -유아의 울음과 같은 - 기호로서 담론 내부로 도입되지만 그 발원지는 상징화 과정의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실재계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욕구의 형태로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 침입하는, 억압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것이다. 실재계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욕구의 형태로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 침힙하는, 억압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것이다. 실재계는 일종의 편재(遍在)하는 미분화된 덩어리로서 우리는 상징화 과정을 통하여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들을 구분해내야만 한다. 실재계를 상쇄하고 상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회현실'이 생성된다. 요약하면 존재란 사고와 언어의 산물이며 실재계는 언어에 선행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상징화의 한계로서의 실재계
1964년 이후 라캉의 이론이 수정되며 실재계는 생물학이나 욕구와의 모든 연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실재계는 여전히 적나라한 물질을 연상시키지만 이 시기에는 상징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욱 부각된다. 실재계는 상징계와 상상계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양자 모두의 한계에 설정된다. 무엇보다 실재계는 외상(트라우마)이라는개념과 연관된다.
의학에서 외상은 일종의 창상이나 손상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인 외상에 더욱 익숙한 듯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체를 통해 기차 충돌사고, 전쟁, 인재와 같은 외상적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사고를 당했거나 주위에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건의 효과는 외상적이며 정신적으로 매우 괴로운 것이다. 피해자들은 이 외상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특정 형태의 상담이나 치료를 받게 된다.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알려진 형태에는 근친상간과 같은 육체적 및 성적 학대들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의 외상은 '현실'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정신적 사건을 의미한다. 정신적 외상은 주체가 외부자극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대면했을 때 일어난다. 가장 일반적인 예로 주체가 너무 일찍 성에 대면하여 전개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주체의 무의식에 정신적 상처를 남기며 이것은 성인이 되었을 대 다시 표면으로 부상한다. 프로이트에게 외상이라는 개념은 아이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실제적으로 또는 상상적을 경험하게 되는 원장면(Prima scene)과 연관된다. 이러한 동화시킬 수 없는 기억은 이후의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어떤 사건이 그것을 의식에 대시 불러들일 때까지 망각되고 억압된다.
외상이라는 개념은 의미화 과정에 어떤 교착상태나 고착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외상은 상징화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주체를 초기발달 단계에 고착시킨다. 예를 들어 어떤 기억은 개인의 정신에 고착되어 심한 정신장애와 고통을 야기시키는데 그/그녀가 아무리 이 기억을 합리적으로 설명학 말로 표현하려해도 쳇바퀴 돌듯 고통이 반복될 뿐이다. 외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화에 라캉이 덧붙인 것은 외상이 상징화될 수 없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실재계이며 주체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영속적 어긋남(dislocation)이라는 것이다. 외상의 경험은 실재계이며 상징계 또는 사회현실 내부로 결코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우리가 우리으 아픔과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여 상징화시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항상 어떤 것이 남겨지게 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언어를 통해 변형될 수 없는 잔여가 언제나 남아 있다. 라캉이
'X'라고 부르는 이 초과분(excess) 이 바로 실재계이다. 그러므로 점차적으로 라캉이 실재계와 조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실재계는 죽음충동 및 주이상스와 연계된다. 우선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Das Ding(사물)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되는 라캉의 세미나들에서 실재계는 초기의 개념화에서 부여되었던 '사물성thingness' 이라는 의미를 상실한다. 정신분석의 윤리에 대한 세미나(1950-1960)에서 라캉은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의 중 특히 억압의 문제를 명료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트에게는 억압이 없다면 무의식도 있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억압된 것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단어, 이미지 또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많은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정신분석에 다향한 학파들이 생기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억압된 것은 이미지, 단어, 감정보다 한층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프로이트도 이 부분을 감지했는데 그는 '꿈의 해석'에서 꿈속에는 해석 너머에 있는 -그가 꿈의 배꼽이라 부른- 단단한 불가입적 충핵이 있다고 추측했다. 라캉에 의하면 억압된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불가입성 중책이다. 상징계 안에 존재하는 실재계의 중핵은 빈자리로 인식되며 모든 그 외의 표상들, 이미지들 그리고 기표들은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 세미나 VII에서 라캉은 이 억압된 요소가 대표상(representative of the representation) , 또는 das Ding(사물) 이라고 설명한다.
사물의 기의 너머를 가리키며 그 자체로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화 너머의 어떤 것이며 그러므로 실재계와 관련된다. 또한 라캉은 이것을 '단조로운 현실 속의 특별한 것(the thing in is dumb reality)' 이라고 지칭한다. 사물이란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하는 상실된 대상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상실된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잃어버릴 수도 없었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사물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 열정의 원인'이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대상이며 단지 사후적으로만 (retrospectively) 구성될 수 있다. 사물은 '객관적으로/대상적으로 (objextively) 말해서 무(no-thing)이다. 그것은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욕망과 관계 속에서만 어떤 것이 된다. 1959-1960년 세미나 이후 사물의 개념은 라캉의 저작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는데 1964년에 이것은 대상 a라는개념에 의해 대체된다. 여기서 실재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사물이란 무(no-thing)이며 주체의 욕망을 통해서만 어떤 것(something)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근원적인 사물이 상실되며 그것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생성된다고 하는 것과 반대로 주체성과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사물을 생성한다. 앞서 우리는 라캉이 어떻게 이 과정을 분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후 라캉은 분리하는 용어를 환상과 기본환상(fundamental fantasy)가로지르기라는 개념으로 보충한다.
무의식적 환상
정신분석은 사회현실보다는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과 소원들의 실상(reality)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무의식적 욕망들은 환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환상은 주체가 주인공이며 항상 소원-궁극적으로 무의식적 소원-의 성취를 표상하는 상상된 장면으로서 방어기제들(defensive processes)에 의해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환상은 섹슈얼리티가들을 본질적인 것이며 정신분석의 주된 관심영역의 하나이기도 하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환상은 결코 전적으로 사적인 문제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며 영화, 문학 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들을 통해 공공영역 내에서 소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은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것이다. 환상 각본에는 한정된 주제 내에서 주요 서사들이 지속적으로 재등장하지만 이들은 주체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우연적인 재료를 통해 끊임없이 재가공 될 수 있다.
환상은 일반적으로 현실과 상상이라는 두 극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프로이트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의 현실을 설정한다.
1. 물질적 현실 또는 육체적 현실
1.심리적 현실 또는 중개적 사고들
(intemediate thoughts)의 현실
3. 정신적 현실 또는 무의식적 소원들의
현실적 환상
정신적 현실이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은 종종 우리의 사고 및 사적인 세계로 이루어진 현실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물질적 현실만큼이나 실제적인 것이다. 환상은 정신적 현실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라플랑쉬와 퐁탈리스는 환상을 두 유형으로 - 근원적 또는 원초적 환상과 이차적 환상 - 구분한다. 이차적 환상은 백일몽과 이미 구성된 각본들의 재가공에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반면 근원적 또는 원초적 환상은 더욱 복잡한 과정이다. 이 환상들은 보편적이며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보편적 환상 구조로서 기능한다. 근원적이라는 말은 모든 이후의 환상들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원에 대한 환상 - 예를 들어 <토템과 터부>에서 프로이트가 환상적으로 구성한 근원에 관한 이야기 - 이라는 의미이다. 원초적 환상들은 주체가 성인이 된 이후 정신생활의 유형을 결정하는 데 이러한 의미에서 고정된 내용을 재현 한다기보다는 '구축한다고(structuring)'할 수 있다.
환상의 기원은 '자가성(auto-eroticism)'와 충동의 환각적 (hallucinatory) 충족이다. 라플랑쉬와 퐁탈리스에 의하면 '실제/실재적 대상이 부재할 때 유아는 근원적인 만족의 경험을 환각적인 형태로 재현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환상들은 욕망이 격앙 되거나 해결되는 초기 경험들에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상과 욕망의 관계에 내재한 속성이다.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환상은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조직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욕망의 근거가 된다. 앞에서 우리는 주체가 어떻게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와 대면하여, 자신에게 '타자의 욕망에서 나는 무엇인가? 와 같은 특정 질문들을 제기하게 되는가를 보았다. 환상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환상을 통해 어떻게 욕망하는 가를 배우며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된다. 지젝에 의하면 환상 공간은 '욕망들을 영사하기 위한 일종으 스크린과 같이 비어 있는 표면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라캉주의가 영화학 분야에서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백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며 특정 대상들에 대한 욕망도 아니다. 그것은 무대화 또는 욕망의 미장센(mise-en-scene)이다.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도출하는 쾌락은 목적의 달성이나 대상의 성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욕망의 무대화로부터 획득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상은 결코 현실에 의해 충족될 수 없는 것이며 현실과 혼동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환상과 실재계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하는 중요한 개념은 대상 a이다.
환상과 대상 a
라캉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1970년대의 마지막 세미나까지 대상 a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대상 a는 라캉의 세 개의 범주 모두에 암시되어 있는 개념이다. 라캉은 대수학적 기호인 a를 1955년에 L도식과 관련하여 처음 도입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은 대타자의 대문자 A에 대비되어 소타자를 가리킨다. 대상 a는 타자의 결여를 대표하며, 결여되어 있는 특정 대상이라기보다는 결여 자체를 뜻한다. 여기서 라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욕망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사라진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므로 상실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을 수반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파열을 통해 아이의 욕망과 어머니의 욕망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다. 이 간극에 의해 욕망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대상 a가 도래한다. 환상을 통하여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착각(illusion)을 지속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외면하려고 노력한다. 타자의 욕망은 항상 주체를 넘어서거나 벗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되찾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남겨진다. 그것이 바로 대상 a이다.
대상 a는 우리가 상실한 대상이라고 할 수 없는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되찾아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이 결여되었거나 상실되었다는, 우리가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지속적인 느낌을 뜻한다. 우리는 항상 만족과 지식과 재산과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으며 이런 목표들이 성취된다 하더라도 항상 다른 어떤 것을 다시 욕망하게 된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메우려고 애쓰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백 또는 심연으로서의 실재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대상 a는 공백이자 간극인 동시에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서 그 간극을 순간적으로 메우게 되는 모든 대상이다. 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대상 a는 대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덮어 가리는 기능을 일컫는다는 점이다. 파빈 애덤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상은 의미화 연쇄의 부분이 아니다. 이는 그 연쇄 안의 '구멍(hole)'이다. 그것은 재현(representation)의 장 안의 결함(hole)이지만 단순히 재현을 파괴하지만은 않는다. 파괴하는 동시에 수선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틈(hole)을 만들어내며 동시에 이를 덮어씌우기 위해 결여의 자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라캉의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역설은 그것이 사후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이다. 사물 das Ding과 마찬가지로 대상 a는 객관적으로/대상적으로(objextively)' 말해서 무이다. 그것은 자신을 불러내는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독자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상기하면 라캉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상대방을 이상화하며 그와 함께 있을 때 완전함을 느낀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 상태의 상상계적 차원이다. 또한 '한 쌍'이 되어 다른 결여된 주체와 관계를 갖는 것에는 상징계적인 차원도 있다. 더불어 그 관계에는 항상 또 다른 어떤 차원이 관계되어 있다. 우리의 배우자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유머가 있고 춤도 멋지게 출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우자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는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포착하기 어려운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데 확실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a -욕망의 원인/대상-이다. 그렇다면 대상 a는 상징계를 구조화하는 공백, 간극, 결여인 동시에 그 결여를 덮어씌워 가리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 a는 대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겨진 잔여이다. 그것은 교묘히 상징화의 수중에서 벗어나는 파편이다. 대상 a는 다르게 말하여 실재계의 잔여이다. 그것은 상징화를 벗어나는 것이며 재현의 너머에 있다. 라캉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환상은 대상 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정의한다.
실재계의 불가능성과 주이상스
마지막 단계인 1970년대에는 불가능한 조우로서의 실재계의 초점이 맞추어 진다. 사실 라캉은 점차적으로 정신분석의 전반적 경험이 모두 이러한 불가능한 외상적 조우를 둘러싸고 선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라캉은 실재계와 현실을 명백히 구분하는 데 이것은 자아와 주체, 상상계와 상징계, 또는 심지어 소외와 분리 사이의 구분보다 더욱 강조한다. 라캉에 의하면 환상이란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며 실재계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안으로 침입할 때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라캉은 이 과정을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부른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주체가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주체는 외상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 주이상스에 대해 책임을 진다. 주이상스는 라캉의 이론 중 매우 복잡한 개념이며 적절한 영어번역이 없는 상태다. 이 개념은 '향락(enjoyment)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쾌락과 고통의 결합, 또는 더욱 정확하게 고통 속의 쾌락을 의미한다. 주이상스는 환자들이 자신의 병 또는 증상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한다. 또한 프랑스어로 이 단어는 성적인 뉘앙스를 가지며 성적 쾌락과 연결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라캉은 종교적 또는 신비주의적 황홀경의 경험을 주이상스의 예로서 제시한다.
라캉은 1953년에도 주이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개념은 1960년대에 와서야 충동과 실재계에 연계되며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일차적 동기는 쾌락 또는 욕망의 충족이라고 주장하며 쾌락 원칙에 우위를 부여한, 충동에 관한 그의 초기 이론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임상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주체들이 고통스러운 외상적 경험들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쾌락원칙의 우위성에 직접적으로 상치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쾌락 너머에 있는 듯한 어떤 것을 '죽음충동'이라고 불렀으며 생명의 일차적 목표는 죽음을 향한 적절한 길을 찾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라캉은 죽음충동을 반복과 연계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프로이트를 따르고 있으나, 우리가 죽음 충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하여 이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여는 욕망 사이로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만, 엘리 래글런드 설리번이 지적하듯 인간은 친숙한 상징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실재계의 외상과 공백 안으로 추락하기보다는,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상징계 안에서 어떤 경험이든 참아내려 할 것이다. 래글런드 설리번은 주이상스를 '우리의 인생에 그 가치를 부여하는 본질 또는 속성'으로 묘사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며 하나의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움직이는 욕망과 반대로 주이상스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이다. (모든 충동에 대한 일차적 정의에서 충동의 속성이 지속적으로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라캉은 주이상스를 욕망에 대치시키고, 욕망은 주이상스의 일관성 안에서 만족을 추구한다고 제안한다. 우리의 의사에 관계없이 상징계는 죽음충동에 의해 통제된다. 죽음은 쾌락 너머에 있으며 접근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금지된 것이다. 그것은 극복될 수 없는 궁극적 한계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한계는 또한 주이상스와 연관된다.
주이상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재나 불충분한 느낌을 통해 그것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주체로서 우리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 의해 이끌린다.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실망하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이 결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어떤 것을 놓쳤다는, 다른 어떤 것을 더 가질 수도 있었다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서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게 될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바로 주이상스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언제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핑크가 말하듯 결국 '우리는 더 나은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나은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더 나은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러한 사고과정의 진지함은 이 생각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다. 더욱이 어떤 것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타자는 우리 자신의 경험 너머에서 향락의 차원을 경험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 무한한 주이상스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각을 통해 마음 속에 그리게 되는 이상, 관념, 가능성으로서 지속된다(insists). 라캉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외존(ex-sists)한다. '그 과정을 되풀이 해보자! 라고 말하는 소원(욕망)이 아니라, '그 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조금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는 없는가? 라고 질문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의 외부이다.
타자가 과도한 주이상스를 경험할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의해 지속된다. 환상은 우리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한 불만 및 실재계의 불가능성과 화해하게 하는 방법이다. 통제나 제어가 불가능한 실재계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환상을 통해 우리의 사회현실을 구성한다. 독자 역시 짐작하겠지만 이것은 앞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자가 -그들이 유태인이건, 흑인이건, 집시들이건 혹은 동성애자이건 - 우리의 주이상스를 훔쳐갔다고 가정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남성적' 주이상스와 '여성적' 주이상스에 대한 라캉의 구분과 함께 주이상승 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에 앞서 문화 분야에서 실재계왜 대상 a라는 개념의 적용사례를 제사하고자 한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카메라 루시다>는 죽음과 상실에 대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구인데 이는 바르트의 전체 저작들 안에서 이 저서가 점유하게 된 우연한 위치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 이 책은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바라트의 마지막 저작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유언 같아 보이기도 한다. 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텍스트의 문체로도 강화된다.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의 본질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명상을 적은 책이다. 바르트가 말하듯 그것은 사진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어떤 본질적인 특성에 의해 다른 이미지들로부터 구분되는가'에 관하여 알아내기 위한 탐색이자 내부의 여행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욕망이다. 그렇다면 <카메라 루시다>는 [서사의 구족 분석 입문]에 나타나는 텍스트의 문법을 설명하기 위한 바르트의 초기 기호학적 시도들과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볼 수 있었던 그의 더욱 단편적이고 유희적이며 열광적 문체를 포기하는 듯 보인다. 이 책이 사르트르에게 헌정되었다는 점과 '물자체thing-in-itself'에 주어진 현상학적 강세는 바르트가 -자신의 현상학적 근원들과 텍스트에 대한 더욱 인간적인 접근으로 돌아가며- 기원으로서 회귀를 표명하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 조급해서는 안 된다. <카메라 루시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루는, 오래전인데,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 남동생이 사진을 보게 되었다 (....) 그러므로 표면상 그것은 이론적 연구라기보다는 소설처럼 보인다. 이 텍스트에서 '나'는 다른 모든 허구적 작품들에서의 '나'와 마찬가지로 텍스트상의 가공인물이며 '실체의/실재적real' 롤랑 바르트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의 유언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우리는 바르트의 전 생애에 걸친 연구가 결론적인 마지막 말이란 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헌정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일단 텍스트가 공공영역의 안으로 들어오면 저자는 더이상 다른 어떤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하며 어쩌면 이 책을 사진의 본질에 관한 연구서라기보다는 '자전적 소설'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투디움(Studium) 푼크툼(Punctum)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은 특정 사진들과 그것들의 지시대상 간의 관계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은 '문자 그대로 지시대상이 방사(放赦) 되는 것이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허구인 반면 사진은 확실하고 진정한 느낌을 지닌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특정 사진은 그 지시대상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은 지시대상을 그 자체에 담고 있는데, 달리 표현하자면 지시대상이 사진에 점착된 듯 보인다(라탕은 뒤축에 붙어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르트는 이것이 사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진에는 두 가지의 기본 요소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그는 스투디움(Studium) 과 푼크툼(Punctum) 이라고 불렀다. 스투디움은 사진에 의해 자극되는 문화적 흥미의 일반적 영역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문화적 의미의 장으로서, 특정 사진에 대한 우리의 취향에 관계없이 사진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평균적 효과를 뜻한다. 반면 푼크툼은 더욱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에 구두점을 찍고(punctuates) 사진 안에서 우리의 특정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푼크툼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진 안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요소이다. 바르트가 말하듯, 그것은 나를 관통하여 찌르고 지나가지만 나를 상처 입히는 동시에 강렬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스투디움이 사진에 대한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느낌을 가리킨다면 푼크툼은 그 매끄러운 표면에 균열을 내는 세부이다. 그것은 사진으로 우리의 눈길을 이끄는 세부이며 바르트는 이를 '부분' 대상과 비교한다. 푼크툼은 우리를 하나의 연상에서 다른 연상으로 인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확장적이고 환유적인 역량을 가진다. 그러므로 푼크툼 또한 사후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연출되거나 사진에 첨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 그것에 대해 돌이켜 생각할 때 기억되는 세부이다.
실재계를 애도하며
<카메라 루시다>는 명백히 애도에 관한 저서인데, 바르트는 낡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을 계기로 일련의 회상들이 시작된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얼굴에 대한 진실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 그것은 매우 낡은 사진이었다. 모서리들은 앨범에 붙여졌었기 때문에 닳아있었고 세피아 색깔은 바래졌으며 사진에는 두 아이들이 그나마 간신히 보였는데 그들은 당시 겨울정원이라고 불리던 유리 온실의 작은 나무 벤치의 끝에 함께 서 있었따. 그 당시 내 어머니는 다섯 살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일곱 살이었다.
이 사진은 사진과 정신분석과 삶과 죽음에 관한 일련의 성찰들을 환기시키지만 우리는 결코 실제로 그 사진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카메라 루시다>는 중심의 부재를 둘러싸고 구조화된다. 텍스트는 끊임없이 이 부재의 주위를 선회하며 근원적 상실에 의해 남겨진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일련의 다른 사진들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결코 근원적 경험 자체로 돌아갈 수는 없다. 텍스트는 결코 진실이나 물자체 또는 바르트가 찾아 헤매는 본질을 생산하지 않으며 사실 그런 것들을 결코 생산해 낼 수 없는 것이다. 부재하는 그의 어머니에서 상실된 대상의 기능을 한다. 바라트는 결코 그가 사랑했던 얼굴이 진실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것이라고는 불가능한 조우가 남긴 잔여들로서의 표상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시대상과의 관계가 사진의 본질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햐 하는 것일까? 사진의 지시대상은 다른 기호 체계들의 지시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나 기호가 나타내는, 실제가 아닐 수도 있는 사물이 아니라 렌즈 앞에 놓인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사물이며 이것이 없다면 사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이나 언어와 달리 사진은 사물이 존재했으며 사진기 앞에 있었다는 과거의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실제적인 것은 사진이 태어나는 순간 상실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에마(nome), 즉 '이미 존재한 것(that-has-been)' 또는 불가공성(intractability)이라는 -사진의 본질이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본격적인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의미로 '실제계'이다. 라캉은 세미나 XI에서 본질적으로 정신분석은 우리를 회피하는 실재계와 조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대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개념은 우연(tuche)이다. 바라트의 텍스트는 이러한 대면들-시진의 본질로 '간주된 것(that-has-been), 실재계의 불가공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얘기-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우연은 주체가 견뎌내거나 동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외상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심부에 있는 견고한 불가입적 중핵으로서 외상이라는 개념이 바르트의 텍스트와 사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주조하고 있다. 빅터 버긴이 지적했듯이, '외상'은 '상처'를 뜻한다. 그리스 단어로부터 파생된다.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라틴어는 '푼크툼'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관통하여 상처를 입히고 사진의 스투디움(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바르트의 세부는 대상 a라는 형태를 통한 실재계의 섬광 같은 만남을 의미한다. - 숀 호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