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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n 07. 2019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슬라보예 지젝  



Everyone agrees on the fact that the crucial moment is the transition from individual to collective destiny."   Slavoj Žižek - La parallaxe )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을 낼 창뿐이다. (바그너)  >  지젝 인용


인간은 '죽음을 동정하는 동물이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기생충(이성, 로고스, 언어)에게 갉아 먹힌 동물이다. (헤겔) > 지젝 인용 


진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라캉) > 제젝 인용


계산하는 자가 그 계산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라캉>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거의 모든 것이 어떤 점에서는 증상이 된다. 결국 여자 조차도 남자의 증상이 된다. 우리는 심지어 '증상'이 '왜 가 아니라 有인가?'라는 영원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라캉이 제시한 최종적인 해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 대신 존재하는 유, 그것은 바로 증상이다. 


라캉의 대답은 세계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나 주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와 언어와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는가? 좀 더 명확히 무엇이 현존하는 현상들에 일관성을 부여해 주는가?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라캉의 대답은 바로 증상이다.


자신의 증상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라캉)


증상은 우리가 광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 무 대신 유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정신분석 과정의 종결에 대한 라캉의 최종 정의는 증상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자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한계 자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공식을 고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의 한계는 계몽 그 자체이다.


우리는 결코 '상황 자체가 말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언어가 즉각적으로 '실재의 언어로서' 가능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도달할 수 없다.


의미효과는 항상 거꾸로, 사후에(apres coup) 창출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혹은 이 상황에 희극적인 뒤틀림을 부여하기 위해 고쳐 말한다면, 그는 죽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memento mori라는 말은 바로 이렇게 읽혀야 한다.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 


우리는 실재를 손에 넣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것의 자명한 부조리를 통해 자신의 불가능성을 육화 하는 순수한 메타언어의 발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캉의 실재가 지니고 있는 역설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실체라는 사실이다.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은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이다.


실재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일련의 효과들 속에서 항상 왜곡되고 빗나간 방향으로 현존하는 원인, 실재가 불가능하다면 그 효과들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 


우리는 실재를 상징화 과정의 출발점, 근거, 토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실재는 어떤 의미에서 상징계에 선행하고, 그 후에 그것이 상징계의 네트워크에 걸려들었을 때 그것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이다. 이는 라캉이 살아 있는 신체라는 실재의 풍요로움을 죽이고, 고갈시키고, 비워내며, 베어 나누어 버리는 과정으로서 상징화를 내세우게 된 가증 큰 동기이다. 그러나 실재는 동시에 이러한 상징화 과정의 산물, 잔여, 나머지, 찌꺼기 등이다. 다시 말해 상징화를 모면하는 나머지, 잉여분인 동시에 상징화 자체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헤겔적인 용어로 하자면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전제된 것이면서 동시에 정립되는 것이다. 실재의 중핵이 향락인 한에 있어서 이러한 이중성은 향락(jouissance), 잉여향락(plus-de-jouir) 사이의 차이라는 형태를 띤다. 향락은 상징화가 기대어 작동하는 토대, 상징화에 의해 구조화된, 실체 없이 비어 있는 토대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잉여 향락이라는 찌꺼기, 잔여분을 산출한다.


실재는 관성적인 현존, 실정성의 충만이다. 실재엔 아무것도 결여된 것이 없다. 다시 말해 결여란 오직 상징화에 의해 도입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에 구멍, 부재를 끌어들이는 기표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실재는 상징적 질서 한가운데 뚫린 구멍, 간극이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가 중심으로 삼아 구조화되는 결여이다. 출발점, 토대로서의 실재는 결여 없는 실정적인 충만이지만, 반대로 상징화의 산물, 잔유분으로서 실재는 상징적 구조에 의해 창조되고 둘러싸인 구멍 공백이다. 

우리는 또한 부정성의 견지에서도 이와 동일한 대립쌍에 접근할 수 있다. 실재는 부정에 무감각한, 부정의 변증법에 걸려들지 않는 실정적인 관성의 소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동시에 그렇게 되는 이유가 실재 그 자체가 그것의 실정성에 있어서 어떤 구명, 결여, 근본적인 부정성의 구현물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실정성에 있어서 이미 그 자체로 순수한 부정성, 비어 있음의 구현물이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다. 그러기에 실재의 대상은 엄격히 라캉적인 의미에서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그것은 다만 싱징적 질서 내에서의, 큰 타자 내에서의 결여의 구현물일 뿐인 대상인 것이다. 숭고한 대상의 너무 가까이는 접근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너무 가까이 가게 된다면 그것은 그 숭고한 특질을 상실하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대상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오직 반쯤 보이는 어떤 일정한 시점에서만, 사이가 떨어진 중간적인 상황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환한 태양빛에 비춰 보고자 한다면, 일상적인 대상으로 변하여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바로 그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펠리니의 <로마>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자. 지하철 공사를 위해 터널을 파고 있던 인부들이 옛 로마 건물의 잔여물을 발견한다. 그들은 고고학자를 부른다. 그들이 건물 속으로 함께 들어갔을 때 믿을 수 없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근심에 잠김 부동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벽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벽화는 너무나 민감해서 외부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즉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빈 벽과 관람객들만 남긴 체 말이다. 


자크 알랭 밀레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실재의 위상은 물질적인 우연인 동시에 논리적인 일관성이다. 첫 번째 접근에서 실재는 상징적인 메커니즘의 자동적인 순환을 붕괴시키는 우연한 조우( 遭遇)의 충격이다. 그것의 매끄러운 작동을 방해하는 모래 알갱이, 주체의 상징세계가 지닌 균형을 깨뜨리는 외상적인 조우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외성과의 관련 하에서 보았듯이, 전적인 우연의 침입으로서의 외상적인 사건은 실정적으로 어느 곳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소급적으로만, 상징화를 모면한 지점으로서 논리적으로 축조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실재를 quid 와 quod 사이의 구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성질의 속성들과, 주어진 그 자체로서의 대상, 즉 실정성 속에서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결정의 네트워크를 벗어난 X라는 잉여 사이의 구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실재는 quid 에 대한 quod 의 과잉이라고, 일련의 속성들과 기술들을 넘어선 순수한 실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외상의 예를 통해 실재는 또한 정확히 그 반대의 것임이 증명된다. 즉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실체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를 쓰기'포스트 구조주의적인 쓰기ecriture가 아니라 쓰여진 것ecrit 와 관련해서 정의해 보면 우선은 당연히 실재는 쓰여질 수 없다고, 다시 말해 필사를 벗어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실재는 기표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쓰여진 것 그 자체이다. 라캉적인 쓰여진 것은 기표가 아니라 대상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라캉적인 관점에서 실재는 궁극적으로 단지 어떤 한계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고 우리 뒤에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다다를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고전적인 역설을 읽는 라캉식 독법이다. 물론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제칠 수 있다. 그러나 거북이에게 닿을 수는 없다.


욕망은 항상 욕망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질문이라고 착각한 것은 이미 대답이었다.


처음에 장애물처럼 보이던 것이 해결책으로 드러난다. 진리가 우리를 피해 가는 그 운동 속에서 우리는 이미 진리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실수를 통해서 오류의 목덜미를 잡는다." (라캉) 


주체가 꿰뚫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타자와 대면하게 될 때 포착해야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자신의 질문이야말로 이미 타자 자신의 질문이라는 사실이다.


주체는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응답, 큰 타자 즉 상징적인 질서의 질문에 대한 실재의 응답이다. 질문을 하는 자는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큰 타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 지닌 불가능성의 공백이다.


진리는 빈자리이며 진리의 효과는 허구의 어떤 조각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


주체는 커튼 뒤에 무언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라고 생각한다. 환영은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커튼 뒤의 빈자리에 실제로 자리 잡고 있다.


'자리'는 그것을 차지하는 대상들을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우리는 숭고한 대상 속에 본질적으로 숭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상에 숭고함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적인 자리이다.


대상이 자신의 육중하고 매혹적인 현존을 통해서 감추고 있는 것은 어떤 다른 실정성이 아니라 바로 그 현존을 통해 메우고 있는 자기 자신의 자리, 공백, 결여, 큰 타자 내의 결여이다. 그리고 라캉이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환상-대상에 대한 그러한 전도의 경험에 있다.


현상 뒤에는 항상 이처럼 그 자체일 뿐인 무, 주체인 무가 있다. 현상을 단지 현상으로 인식하기 위해 주체는 그것을 넘어서야 하고 그것을 가로질러야 한다. 거기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이행행위일 뿐이다.


어떤 현상은 정확히 자신을 거짓으로 제시함으로써 진실을 말할 수 있다.


화자는 수신자에게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의미로,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로 되돌려 받는다.


정신분석의 종결은 바로 '주체의 폐기'로 이루어진다. 이때 '폐기'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주체는 더 이상 자신을 주체로서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큰 타자의 존재가 아니라 큰 타자의 비존재를 떠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그가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주체로서의 자신 또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 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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