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종이막씨

[나명작]7

by 정원에

[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왜 사는지 묻고 따지고 싶어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 합니다 . 이래 저래도 이유는 분명하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사는 건가에 대한 물음에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타인의 안녕도 챙기면서라고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덧 사흘뒤면 2023년이 각자의 갤러리 속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잠깁니다. 한 해 동안 내가 '오늘도 안녕'하게 살아내는데 도움을 준 모든 것(표상뿐만 아니라 물자체까지도)에 대한 인사를 해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늦더라도 올해 안에는 그 고마움을 고백해야겠습니다.

_________2023년에게 보내는 공개고백_8 ]




일요일 오후 4시 43분

나른하거나 일부러 바쁘거나. 현실과 정면대결하지 않기 딱 좋은 시간이다. 짧거나 긴 여행에서 (두발에) 자동차에 끌려 돌아올 때 세상 모두가 출발선을 다시 긋고 있다. 심지어는 노린재마저도 땀범벅이 되어 뛰고 있다. 그 땀이 손가락 끝에서 콧속으로 훅하고 들이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있어 다행이다. 하거나 말거나. 아니면 하다가 말거나, 말았다가 하거나. 그래서 전문적인 한두 가지 메뉴만 파는 식당이 좋다. 메뉴판이 아예 없는 집이 더 편안하다.



월요일 오전 11시 16분

3년 동안 2천만 명이 넘게 죽은 흑사병, 같은 기간 동안 7백만 명이 넘게 사망한 코로나19. 사람들은 신에게 매달렸지만 신은 응답이 없었다. 그렇게 팬데믹은 잃었던 미소를 인간이 되찾으려 도전했던 계기가 되었다. 모나리자처럼. 죽음뒤의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가치를 두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각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영화 <골든슬럼버> 대사 중). 올해 이 시간에는 항상 5반에서 강의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11시에 미리 미소를 짓고 들어간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있어 다행이다.



화요일 오전 7시 21분

달의 날 다음날. 인생을 이루는 궁극의 요소는 고통과 지루함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진리를 만난다. 몽롱하게 허망한 사이에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딱 좋다. 그래서 더 우울해지기 쉽다. 하지만 기록된 과거가 있어 참 다행이다. 모든 나는 다 과거에서 왔으니까. 그때 내가 무엇을 읽고, 뭐라고 쓰고, 왜 찍었는지, 어떤 것을 잃었는지 다시 읽고, 읽고, 읽기 딱 좋은 날이다. 과거에 당당해야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받기 딱 좋은 날이다. 그래서 천천히 갈아서 살며시 내린 한잔의 진한 커피가 가장 맛있는 때이다.



수요일 오후 3시 30분

에피쿠로스의 정원으로 놀러 가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텀블러 하나 들고 5층 문을 열고 나서면 온 세상이 나를 반긴다. 잊지 말아야 한다. 휴대폰은 데스크 위에 놓고 나오는 것을. 그렇게 걷다 보면 열정적이었던 휑한 텃밭이, 봄눈 날리던 벚나무가, 펜스를 넘어온 밤나무가 말을 건다. 팔과 다리가 마냥 늘어질 것만 같은 나른한 오후에라도 존재할 때 존재하지 않을 것을 걱정 말라고. 존재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반반을 가른 얇은 종이막은 형식이고, 허상이니까 그 얇은 막만 걷어내면 신경 쓰지 않고 달콤하게 짭조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목요일 오후 1시 51분

가장 거대한 날이다. 한 주를 이미 다 잘 넘겼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마음을 장착하고 나선다. 그래서 들린다. 코르티솔이 쪼옥 빨려 나가는 소리가. 수요일을 잘 살아냈고,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이 모닝커피에 더해 더 진해진다. 삶이 외롭고 괴롭다는 것은 나를 직면해야 해결된다는 사실을 직면하기 딱 좋은 날이다. 좌절과 불평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할 때마다 나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딱 좋은 날이다. It is what it is. 그러다 보면 태양이 비바람에 가려져도 휑한 길가 화단에서 사라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다 보인다.



금요일 낮 12시 32분

남자 317호와 여자 26호가 짝이 된 지도 22년 19개월이 되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나가고, 같이 잘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빵에서 떨어져 내린 빵가루가 냄새도 없이 말라 나뒹군다. 하지만 오늘만이라도 마음을 즐겁게 하고 싶으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빵가루 말고 빵을 보라고 내 안의 내가 알려준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마음의 채권자가 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 중 그 여자와 이 남자의 몸무게가 가장 가벼워진다고. 데비 모스코비츠의 '사람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한 주를 시작하지만,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상황과 타협하게 된다' 이 말에 마음이 상하지도 않는다고.



토요일 저녁 8시 29분

시작인가 끝인가. 이런 선택은 성장 과정이 응축된 각자의 몫이다. 아주,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 숨어들어 경계에서 서성이는 나의 그 경계가 드농관 711번 방에서 만났던 옅은 미소를 슬쩍 따라 해보기만 해도 옅어지는 듯 기분이 좋아지면 된다. 허리를 뜨끈한 돌침대 위에 늘어뜨리고 조토(Giotto)에서 보통(Botton)으로 이어진 거대한 협곡 사이를 휘감아 도는 의지의 바람에 몸을 맡겨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얇은 비빔국수 한 젓가락으로도 혓바늘이 사라지고 나의 면역력이 조금은 더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2024년에는 일,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매일 나뉘지 않고, 나누지 않으면서 더 같이 다 잘 살아 보는 겁니다. 우리 같이 언제나 안녕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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