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나명작] 4 _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

by 정원에


불, 불이야. 불. 지금 바깥에 불!...




스무 살 때. 사범 대학 지하 공간, 중강당. 11개 과의 새내기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한수백 명은 넘었지 싶다. 다른 대학에서도 친구들을 불러왔었나 보다. 그렇게 다른 가들의 연기에 몰입해 있는 순간, 한 사람이 기울어진 강당 뒤쪽에서 무대 앞으로 막 뛰어내려오면서 소리쳤다. 한 5초 정도 걸렸나 보다. 그 사람이 뛰어 내려오면서 소리친 시간이. 그, 짧은 순간 이런!. 어쩌지, 어디로 뛰어야 하지,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둑한 강당 여기저기서 어떻게, 어떻게 하는 소곤거림이 들렸다. 기울어진 강당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앞, 가운데, 뒤. 난 그 가운데 구역의 가운데 정도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과 몇몇 친구들과 나란히. 그때 갇혀 있다, 는 생각을 번뜩한 것 같다. 막혔다. 답답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눈동자들이 희번덕 거리다 마주치고 있었다.


아, 힘들게 공부만 하고, 비탈진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옥탑방에서 몇 달 살다가 이렇게.... 하는 억울함 같은 게 치밀어 올라왔다. 그냥 무작정 뛰자, 아까 그 사람이 뛰어 내려온 곳으로 뛰어 올라가자,라고 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2초, 아니 1초 정도가 더 지났을까. 강당 뒤쪽, 아까 소리친 그 사람이 뛰어 내려온 어둠 위에서 딸깍하면서 불이 켜졌다.


소리친 그 사람을 따라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따라 뛰어 내려왔다. '거기, 환자분, 환자부~은....' 하면서. 가운데 통로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제야 먼저 뛰쳐 내려온 이가 제대로 보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연신 머리카락을 꼬고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생처음, 연극이라는 걸 본 내가 처음 겪은(?) 연기의 일부였던 거다. 그날은 사범대 연극제 중이었다. 나는 다음 우리 과의 연극 공연을 기다리면서.


그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역할을 했다. 일. 본. 순. 사. 독립군을 잡아다 악랄하게 고문을 하는 뭐 그런 역할. 강의실 의자를 다 밀어놓고, 저녁에 남아 떡튀순을 선후배들과 나눠 먹으면서 했던 연습. 그때부터 옥탑방에서 신문지를 여러 개 둘둘 말아 검은 절연 테이프롤 칭칭 감아 만든 순사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면서. 내가 어떻게 그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연기 도중에도, 끝나고도 많은 찬사(!)를, 먹었다. 제대로 악랄했다고, 리얼했다고. 화장실에서 혼자 낄낄거리는 황정민을 한대 패고 싶었던 그 심정이었을까.


연기에 소질이 없어 그랬지 싶다. 지나면서 보니 그날 하루도 그런 날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정신병은 '미친 사람'병이라 다짐(?)을 한번 더 진하게 하게 된 순간. 암만큼, 아니 어쩌면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라는 불안감에, 제발 미쳐서는 안 된다, 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던. 그렇게 그 강당처럼 찐득하게 눅눅한 시간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어둑한 강당을 벗어난 이후부터 비로소 진짜 나는 제대로 된 연기를 지금껏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처음부터 크게 될 놈도 아니었고, 크게 사고 칠 깜냥도 되지 못하는 게 나라는 것을 일찍 스스로 눈치챘다는 것. 그랬기 때문에 내가 '나'가 되어 감당해야 하는 연기를 한 번도 거부하거나, 한순간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 하면서도 이게 맞나, 맞겠지 하는 순간들은 계속 이어졌지만. 뛰어나지는 않지만 한 순간, 한 순간을 혼신을 다하려는 연기력으로 그 순간이 휘발되지 않도록.


맞다. 시작해 보니, 살면서 겪어 보니 그냥 좋아지는 게 있다. 거대한 기대감, 사명감 뭐 그런 거 없이도. 그렇게 진하게 맛깔난 어묵탕보다 밍밍한 국물을 훨씬 더 많이 만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더 알아 가는 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여전히 연기력은 부족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하루, 하루. 나와 이어진 모든 이들의 밍밍하지만 중요한 회복력을, 같이 키우는데 아주 소중한 방법을 이렇게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오늘도, 이 순간도 다시 한번 외쳐 본다. 그래, 너도 내 인생 연기에 끼어든 명작이구나!



아침에 일어나고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이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게 된 것만으로도

회복이라고 봅니다

_ 극 중 대사 중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야 하며 위로받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