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만 먹은 사람의 삶도 힘들려면 한없이 힘들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아이들이 많다. 밝고, 맑고, 쾌활한 아이들 사이에 숨어들어 있어도 내 눈에는 왜 그리 잘 보이는지 모르겠다. 백이면 백가지 이유를 가진 아이들이고, 가정이지만 좀 더 떨어져 보면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원인이라는 것에는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 없는 것도 비슷하다. 한여름에도 마음이 얼어붙어 버린 아이들은 보통 모른 척(?) 하고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린다. 서로가 워낙 바쁘기도 하고, 지나면 잘 살겠지, 졸업하면 다 먹고살겠지, 내가 아니어도~ 하면서 말이다.
워낙 묵직하고, 엄격한 공동체 분위기 속에서 혹여나 마음이 더 불편하게, 자신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그 반대의 이유로 폭발(!)해 버리는 경우를 여러 번 봐왔기 때문에 더욱 그런 애매한 어른의 태도를 취하는 거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기가 서로 페어링을 하듯이, 라디오 주파수가 맞으면 선명하게 잘 들리듯이 슬쩍 맞아지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어느 누구의 노력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낌이 맞닿는 경우다. 이럴 경우는 참 행복해진다. 내가 어른인 게 좋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게 좋고, 10대들에게서 나를 볼 수 있어 좋다.
나에게는 여니가 그렇다.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엊그제, 2024년 12월 중순, 겨울. 또래 열아홉수백 명이 연극을 보고 있던 그 시각. 늦은 여니는 그렇게 멀뚱하게 휑한 마로니에 공원에 혼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맵싸한 바람에 휴대폰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곧게 얼은 자세로.
학기 초 내 수업 맨 앞자리에 앉아 새하얀 얼굴, 맑은 눈으로 웃는 표정이 눈길에 가던 다른 반 아이.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이 많이 아파 한참 학교를 쉬어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다행히 수능 전 무렵부터는 늦지만, 담임교사를 찾아 다시 꾸역꾸역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까맣게 가리려 했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 여니다. 오늘은 왔구나, 왔어. 잘 왔어.'하고 말을 걸었다. '밥은? 왔으니까, 급식은 꼭 챙겨 먹고 가라. 끼니 건너뛰면 평생 못 찾아 먹는 거, 아나?'하고 실없는 말을 계속 걸었다.
영하 10도였던 그날 (아마 반팔일듯한) 면티 하나만 입은 듯 목이 드러나는 얇은 봄가을 후드를 입고 붉은 입술이 간지러운 듯 비비고 있었다. 원래 그랬듯이 그냥 물었다. '오늘 엄청 춥지? 밥은?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냐? 괜찮으면 이거, 샘 꺼, 지지난주에 세탁한 건데, 머플러 이거, 빌려 줄까?'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마스크 안에서 입꼬리에 밀려 올라 온 눈가가 실룩거렸다. 여니는 나에게 정말 잘 웃어준다. 여니가 학교를 오면 내 옆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 생각할 만큼. 일부러 밀어내는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혼자만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팝콘 터지듯 벚꽃이 피어오르던 4월.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여니.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냥 물었다. '야, 잘 생긴 너.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그때, 웃는 여니 얼굴을 봤다.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고 있었다. 여니가 한참 사라지고 난 뒤, 바로 뒤에 앉았있던 친구 빈이가 그랬다. '잘 모르겠어요. 많이 아프데요.'
알지만, 모른 척하는 눈치였다. 맞다. 사람은 열아홉 정도만 되어도 다 안다. (거의) 모든 영역을 다 아는 척 하(려)는 '어른'보다 더 많이, 잘 안다. 사람이, 부모가, 10대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 잘. 사랑으로 무엇을 치료할 수 있는지도 다 안다. 표현을 못하고, 안 하려고 할 뿐이다.
어제. 우리 반 아이들 출석 체크를 하는 중에 오른쪽 팔뚝을 툭하고 쳤다. 여니였다. 검은 마스크를 한 채 모자 위에 후드까지 올려 썼다. 잠깐 아이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 어!'하고 신음 같은 인사만 내뱉는 사이, 아이들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아주 추운 그날, 이백여명이 넘는 열아홉 사람들과 연극을 봤다. 분홍빛 의자에 앉아 서로의 따듯한 온기를 나누면서. <불편한 편의점>. 다 보고 난 뒤 나오면서 몇몇 아이들의 이야기가 귓전에 울렸다. '아, 불편해. 불편한 연극이야. 사람을 자꾸 생각하게 만드냐, 만들긴....'
거대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대체적으로 그렇다'라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확률적으로' 그럴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로 거기(!)까지 가보지 않아 그런 생각으로 퉁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구도 '이런 아이(열아홉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편견을 끊임없이 밀어내야만 만날 수 있는 개별성의 문제다. 그나저나 여니 담임선생님도 한 걱정이다. (가능한)결석 일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이들속으로 숨어 들듯이, 세상속으로 잘 스며들었으면 참 좋겠다. 졸업을 한 스무살 사람 여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