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비니하니에게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르트르가 남긴 이 말을 들어 본 적 있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는 수많은 선택(Choice)들이 있다는 의미이지.
그럼, 수많은 선택과 선택 사이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이번 선택과 다음 선택 사이의 시간을 채우는 것들 말이야.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들이 선택 자체보다도 더 한 개인의 진짜 삶의 순간들이지. 질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삶의 시간들.
그래, 평온이야. 몸은 물론 마음까지 따듯하고 안정된 평화의 상태.
하지만 그 상태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보면 말이야. 금방 깎아지른 절벽 위의 흔들 다리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을 (가끔)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선택의 기준을 만드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방해물을 만난 상태이지. 그런데 엄청난 장벽이 되는 것 같은 그것들도 흔들리는 자신에게 집중해서 눈을 살짝 감고 심호흡을 여러 번 하다 보면 명확하게 보여. 그 원인들이라는 것들이.
바로 '불안'과 '불만'
이 둘은 언제나 우리의 (짧디 짧은) 평온을 깨트리려고 시간, 장소 관계없이 호시탐탐 심장 안에서, 혀 밑에서, 망막 뒤에서, 손끝 발끝에서, 혈관 속에서 스스로를 해코지하려는 정신의 러스트(녹)들이란다.
질적으로 재미있고, 때로는 의미 있는 삶이란 결국 스스로에게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려는 이 둘의 농도를 얼마나 묽게 만들어 배출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다음 선택을 하기 전에, 한 후에!
우선,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주로 어떤 상황에서 (때로는 막연하게) 불안해하지? '불안하다'라는 게 어떤 상태인 거지?
그래 맞아. (잘) 못할 것 같고, (잘) 안될 것 같고, (선택이) 틀렸을 것 같을 때. 그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비난을 듣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지적을 받을 것으로 상상이 될 때 미안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들이지, 분명.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안'이라는 어두운 에너지는 안(너)에서 밖(세상)으로 향해. 밖에서 정해진 기준에 스스로 가 닿지 못할 것(같은) 상태를 이미 상정해 놓은 상태인 거지. 밖에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응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바로,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이 약할 때 필수불가결하게 따라 나오는 불편한 감정이란다.
'불안'할 때는 세상이 아니라 너를 좀 더 들여다보면서, 너에게 말을 걸어 보면 좋아. 하던 것을 일단 멈추고, 전자 기기들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봐. 공기를 느껴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해봐.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기록해. 낱낱이. 다음의 불안에 대한 증거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다음으로, '불만'.
이 감정은 자기 회피의 상태에서 피어나는 악마의 꽃이야. 잘 차려입고, 잘 먹고 다니면서 잠깐 겉으로는 예쁘고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네 안에서는 기껏 (어렵게 한) 선택들이 잘못되고 있는 핑계들을 찾는데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악마 같은.
그 감정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사나운 에너지란다.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되게 해달라고 떼쓰는 형국이지. 너의 기준에 밖(세상)의 기준이 맞춰줘야 한다는. 그런 세상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불만'스러울 때는 네가 아니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내다봐. 내다보면, 특정 인물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보일 수도 있고, 규정, 규칙, 제도, 법 등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하드웨어가 보일 수도 있고.
이제, 모두 본격적으로 이십 대의 삶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만나게 될 두 감정드리지.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불안'과 '불만'이 뿜어내는 (탁한) 에너지의 방향성에 주목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야.
이 말은 곧, 네 스스로가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직면'하는 데 있다는 힌트가 되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 직면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있는 거고.
네 삶에 직면하는 방법론, 세계관을 만드는 데 온 열정을 다 쏟기를 바란다. 경험이라 쓰고 열정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을 말이다. 집 밖을 나가지 않으면, 돈을 쓰지도 않고, 부딪히는 일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지. 사람은 누구나 의미 있고, 재미있게 살고 싶으니까. 그것들은 자그마한 화면 속에서 타인들이 던져주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충족되지 못하는 고귀한 것들이니까.
박차고 나가 수많은 경험을 하는 동안 관계를 익히고, 익힌 관계 속에서 세상사는 법을 (스스로) 배우고, 그 배움 속에서 스스로가 보이기 시작한단다. 그렇게 스스로가 조금씩, 조금씩 보여야 다음 선택을 위한 (너만의) 기준이 확고하게 서게 되는 거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어른스러운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말이야, 사실은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는 것일지도 몰라. 모른 척하지 않고, 누군가가 대신해주겠지 하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와 맞짱 떠보는.
평온한 삶이란 바로 그 기준에서 출발하는 거란다. 그 기준으로 언제나 항상 '오늘'인 너의 하루를 충만하게 채워가는 것이지. 물론 그 기준이 (아직은) 없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회전은 절대 멈추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십 대부터 숲 속에서 혼자 사색의 삶을 선택한 소로우.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이미 절망한 사람이며 어두워져 가는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
이라고 단언한 그가 말한 '하루의 질'이란 결국 스스로 만들어내는 '불안'과 '불만'의 감정들을 얼마나 경험하지 않고 사는 시간들이 밀도 있게 너의 하루를 촘촘히 채우느냐를 말하는 거겠다 싶단다.
(2024년 12월 22일)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예술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구도자에게 쓰는 편지,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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