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에게 먼저 다정한 사람

[고3의 기술] 06

by 정원에


'나를 움직이는 힘은 말이야, 돈이야. 돈. 난 돈 주는 사람한테는 잘해. 그래야 먹고살지.'


'그래? 맞는 이야기지. 그건 그렇고. 어디에 있을 때 마음이 가장 편안 해, 넌?'


'난, 우리 집. 그럼, 넌 어디에 있을 때 마음이 젤 안 편한데?'


'나? 어..... 난, 우리 집.'


'어? 그러쿤!.'




2층에서 3층으로 돌아 올라가는 계단 끝. 별관으로 이어지는 철제문을 막 열려는 순간, 이 대화가 들렸다. 급식 지도를 하는 중이었다. 긴 줄 앞쪽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열여덟 먹은 두 남학생.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은 평소보다 진지했다.


<사회 문제 탐구> 수업에서 앞뒤로 나란히 앉아 있던 아이들이다. 뒤이어 물었던 친구 표정이 머쓱해지면서, 급하게 점심 메뉴로 화제 전환을 하려는 모습에서는 졸던 앳된 얼굴이 되살아났다.


이-푸 투안(Yi-Fu Tuan)이 나를 통해 아이들에게 던져 준 물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토포필리아 topophilia를 생각해 보고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그곳에만 있으면 좋은 추억이 피어나는 곳, 방전된 자신이 엄청나게 충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최애'하는 장소에 대한 애착, 즉 장소애 즉, 사람과 장소 사이의 정서적 연대이다. 그리스어의 장소, 땅을 의미하는 토포스 topos와 애착,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 phiia가 만났다.



초-중-고를 다 나온 바닷가 내 고향

10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 집(내 방)

삶은 장소의 총합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집(문 바로 뒷자리)

자주 가는 카페(창가 맨 끝자리)

매일 걷는 산책로(흔들의자)

너무 좋아하는 00 공원(뒷동산)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꼭 들르는 짧은 등산로(중간쯤에 있는 너른 바위)


00동 00 아파트 6층 발코니

출근 전 아침마다 매달려 보는 제일 키 큰 오른쪽 끝 철봉대.

운동장 맞은편 밤나무 아래 벤치



좋은 추억이 많은 고향, 두 번째로 이사해 3년을 살았던 도시부터 특정한 장소 안에서 특히 자신에게 아늑함을 주는 미세한 공간까지 다 아우르는 의미다.


일생은 특정 장소에 얼마간(또는 전 생애를) 머물고 그와 이어진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의 총합이다. 일상이라고 표현하고, '지금'이고, 언제나 '오늘'이고, 몇 년 몇 월 며칠의 누적인.


하지만 화려하고 현대적인 사회에서 자칫 잘못하면 에드워드 렐프의 표현처럼 장소 상실감에 빠져 그 아까운 총합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다.


잦은 이동과 획일화된 대도시 환경에서 자신만의 정서적 공간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피해, 소음과 조명을 피해 자꾸만 집 안으로만 숨어들어 가상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도 집 가고 싶은 마음은, 출근(등교) 하자마자 집 가고 싶은 마음은 들어서기만 해도 행복하고, 연대감을 느끼며 이미 복식 호흡 몇 번 한 것처럼 차분해지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 그런 장소. 그게 아예 없이 지나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오십이 넘어서 보니 - 18살도 14살 때를, 53살도 14살 때를 돌아보는 정서적인 반응 정도는 비슷하다. 몇 개의 장면, 몇 곳의 장소 정도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 많이 아쉽다. 너무 아깝다. 그 시간이, 공간이.


돌이켜 보면 누구나 일생에 토포필리아는 자연스럽게 어찌어찌하다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장소와 그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이다. 흔히 '우리 동네'라고 표현하게 되는 그곳에서 말이다.



그 장소에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 행복했던 순간, 슬펐던 기억 등으로 강력한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개인적인 역사,

그 장소에서 자긍심과 소속감을 높여준 공동체의 역사,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느낀 계절의 변화, 익숙한 타인, 익숙한 풍경에서 편안함과 안정감



두 발로, 오감으로 구석구석 만나내는 길목 사이사이에 이런 토포필리아는 (숨어) 있다. 원래부터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모든 여행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은 '나의 토포필리아'로 되돌아가고 싶은 이유다.



나는 진짜 부자가 되고 싶다. 토포필리아를 자꾸 늘리는 진짜 부자. 스스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들어서기만 해도 충전되고, 저절로 가슴이 펴지고, 잠깐 심호흡만 몇 번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루트를, 루틴을 가진 사람으로.


그들은 진심으로 경청하는 태도가 눈빛에 배어 있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배려하고, 솔직하고 진솔하며, 긍정적이고,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서 꾸준함으로 밀고 나가는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그 마음으로 둘러보면 잠 깐 만에도 주변에 이미 여럿 보인다. 그들은 눈빛과 말투에서, 내미는 손과 걸음걸이에서 자기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진짜 부자로 사는 길을 공기에 묻혀, 바람이 실어 오래전부터 알려주고 있었다.



나와 (생각도, 직업도, 가치관도)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커뮤니티에 참여하기)

자연과 자주 접촉하기(건물 안보다는 밖으로 나가기)

개인적인 공간 만들기(행복해지고 싶을 때, 위로받고 싶을 때 머무르고 싶은 곳 정해두기)

내가 사는 동네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 갖기(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 깨닫기)



이런 것들은 멀리서 찾아야만 하는 게 아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 말캉하게 행복한 일상은 우리 동네를, 내가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를 색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지고 산 시간이 길수록 늘어난다.


그 시간들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먼저 다정하게 대한 하루만으로도 꽤나 좋은 장소에서 아주 괜찮은 삶을 사는 거다.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토(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일(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월요일 새벽에는 브런치 성장 일지 [브런치 덕분에]를 발행합니다)

화(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수(출근전 발행)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목(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금(출근전 발행) : 고3의 기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제야 나한테 자꾸 미안해지는 나